사법부에서 당사자 중심으로… 'K-디스커버리' 성공 위한 조건 [넘버링+]

이혁기 기자 2026. 4. 1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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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연속기획 넘버링+
집단소송: 미뤄선 안 될 논제 2편
또다른 열쇠 디스커버리 제도
韓 재판 시스템에 도입하려면
사전 심사, 증거 수집 절차 등
예상 부작용 사전에 방지해야

재판 전 당사자들이 보유한 증거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디스커버리' 제도. 이 제도를 한국에 도입하면 소비자와 기업 간 '정보 비대칭'을 해소할 순 있겠지만 '엉터리 소장'이나 '찔러보기식 소송'이 난무할 것이란 우려도 나옵니다. 여기엔 우리나라의 현재 재판 시스템이 '디스커버리 제도'를 운영 중인 미국과 다르다는 원초적 이유가 깔려 있습니다. 더스쿠프 연속기획 넘버링+ '집단소송: 미뤄설 안 된 논제' 2편에선 디스커버리 제도의 과제를 풀어봤습니다.

집단소송제가 자리를 잡으려면 디스커버리 제도가 꼭 필요하다.[사진 | 연합뉴스]
최근 법조계에서 '한국에 집단소송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기업의 위법행위나 과실로 상당수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을 때, 이들을 효과적으로 구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게 공론화했기 때문이죠.

그 배경엔 지난해 말 개인정보 유출로 물의를 빚은 '쿠팡 사태'가 깔려 있습니다. 당시 쿠팡은 수천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는데도 미온적인 태도를 일관해 국민적 공분을 샀지만 소비자들이 할 수 있는 대처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물며 민사소송 하나 제기하는 것에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집단소송이 없는 탓에 소비자 개개인이 비용과 시간을 쏟아부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집단소송: 더이상 미뤄선 안 될 논제'를 기획한 이유입니다.

다만, 집단소송법이 소비자의 실질적인 방패 역할을 해내려면 한가지 제도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재판 전 소송 당사자들이 각자 보유한 증거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디스커버리(Discoveryㆍ증거개시)'입니다.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면 해당 기업의 내부 문건은 물론, 직원들이 주고받은 이메일이나 사내 메신저 내용까지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원고(소비자)와 피고(대기업) 사이에 존재하는 '정보의 비대칭성'도 해소할 수 있습니다. 디스커버리 제도와 집단소송법을 함께 논의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선 디스커버리 제도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일단 첫발을 떼긴 했습니다. 디스커버리의 본고장인 미국 민사소송 제도를 참고해 이른바 'K-디스커버리'를 한국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지난 2월 공포된 '대ㆍ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입니다.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가 피고의 자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개정안의 골자인데, 2년 후인 2028년 2월 20일 시행합니다.

아울러 특허법, 일반 민사소송법 등 K-디스커버리를 적용한 개정안들이 국회에 줄줄이 발의돼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은 제도의 타깃이 기업 간 기술 탈취나 손해배상 소송에 맞추고 있지만, 향후 일반 민사소송으로 확장한다면 소비자들도 디스커버리 제도를 적극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디스커버리의 도입 배경과 현황 이야기는 더스쿠프 통권 694호 'K-디스커버리 함의 1편'과 695호 2편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사진 | 게티이미지뱅크]
관건은 K-디스커버리를 도입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입니다. 디스커버리를 한국 사법 체계에 적용했을 때의 부작용 또한 살펴봐야 합니다.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국민이나 소비자를 위한 K-디스커버리를 만들기 위해 기업들이 반발하는 포인트도 보완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도입도 하기 전에 '논쟁의 늪'에 빠질지 모릅니다.

2007년 미국으로 이주해 현지에서 활동 중인 김원근 변호사(김원근 법률사무소)는 "한국의 현재 재판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디스커버리를 도입하면 득보다 실이 더 많을 것"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한국과 미국 양국의 사법 실무를 두루 경험한 그가 K-디스커버리 도입에 우려를 내비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집단소송: 미뤄선 안 될 논제' 2편에선 K-디스커버리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김 변호사와의 인터뷰를 1문1답으로 정리했습니다.

✚ 디스커버리를 도입하면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했는데, 왜인가요.
"한국의 민사소송 진행 절차 때문입니다. 한국처럼 민사소송의 소장(원고가 소송을 개시하기 위해 제출하는 문서) 제출이 쉬운 나라는 없습니다. 법원이 요구하는 형식만 갖추면 내용이 어떻든 받아들여져 재판을 진행하거든요. 반면 미국에선 재판장이 소장을 걸러내는 '케이스 심사'를 엽니다. 재판장이 법적으로 판결받을 수 있는 내용인지 살펴보고, 아니라고 판단하면 재판을 열지 않고 과감하게 기각해요. 일반적으로 전체 사건의 20~50%는 소장 단계에서 조기 기각됩니다."

✚ 법원에 그런 권한을 준 이유가 뭔가요.
"주장이 법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엉터리 소장'이나 '찔러보기식 소송'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취지죠. 징벌적 제재를 받을 수도 있어요. 보통은 서면으로 경고장을 받지만, 상황에 따라선 법원에 벌금을 납부해야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선임한 변호사 비용이나 소송 비용 일부를 지불해야 할 수도 있고요."

✚ 그런데 소장을 심사하는 게 디스커버리와 무슨 관련이 있나요?
"디스커버리 제도를 한국에 도입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소장 내용이 통과돼 재판으로 넘어가면, 원고는 디스커버리를 근거로 피고에게 광범위한 내부 자료를 내놓으라고 합법적으로 요구할 수 있게 됩니다. 기업을 예로 들면, 특허 기술을 개발 과정이나 내부 의사결정이 담긴 이메일 등 회사의 운명이 걸린 정보를 전부 공개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일단 재판이 열리면 정보공개를 거부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해당 기업에 위법 사실이 없어도 말입니다. 기업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한 상황이죠."

✚ 디스커버리 제도가 악용될 수 있다는 얘긴가요.
"그렇습니다. 소장 한장이면 상대방의 내부 정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요. 오로지 상대방의 기밀을 캐내거나 합의를 종용할 목적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케이스가 엄청나게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 | 뉴시스]
실제로 한국에서 소장의 법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이유로 재판이 열리지 않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민사소송법 제254조 '재판장 등의 소장심사권'에 따르면, 재판장은 소장에 당사자의 이름이나 청구 취지를 제대로 기재했는지, 인지대(수수료)는 납부했는지 등 '형식적 요건'만을 심사합니다. 내용의 진실성이나 타당성은 검증하지 않죠. 바꿔 말하면, 서류 양식만 맞으면 누구나 상대방을 법정에 세울 수 있다는 얘깁니다.

국내 기업들이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꺼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한국지식재산협회(KINPA)가 지난해 40개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의 68.0%가 디스커버리 도입을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특히 전기전자 분야 기업(92.0%), 연간 500건 이상 특허를 출원하는 기업(88.0%)의 반대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한국지식재산협회는 보고서에서 "영업비밀 탈취 수단으로 악용할 가능성이 있고, 소송 비용 부담이 증가해 기업이 특허 분쟁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한 뒤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명분을 떠나 이 부분을 보완하지 않는다면 K-디스커버리는 원고와 피고의 '또다른 싸움판'을 열어줄 공산이 큽니다. 어쩌면 이 때문에 K-디스커버리의 도입이 미뤄질 지도 모릅니다. 이는 국민이나 소비자, 기업에도 좋지 않습니다. K-디스커버리를 둘러싼 합리적인 논쟁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 또 어떤 부작용이 있나요.
"디스커버리가 자칫하면 재판을 장기간 지연시키는 변수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 역시 한국과 미국의 민사소송 방식이 다른 데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입니다."

✚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신다면요.
"미국 민사소송에서 증거 수집 절차는 철저하게 '당사자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법원이 거의 개입하지 않는 상태에서 원고와 피고가 직접 소송과 연관돼 있는 증거와 정보를 수집하고 교환할 수 있습니다. 증인 소환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원의 의사와 상관없이 당사자 주도하에 소환장을 발부해서 증인을 부르고 신문할 수 있습니다."

한국 민사소송에서 증거를 제출하려면 법원의 승인이 반드시 필요하다.[사진 | 연합뉴스]
✚ 한국은 어떤가요.
"반면 한국에선 철저히 법원의 통제를 거쳐 증거를 제출해야 합니다. 법원이 허락해야 증거든 증인이든 채택할 수 있죠. 문제는 이 기간이 짧지 않다는 점입니다. 보통은 1~2주가 걸리지만 때에 따라선 3~4개월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김원근 변호사의 말처럼 한국 민사소송은 당사자가 법원에 증거 채택을 일일이 신청하고 허가받아야 하는 '법원 중심'의 증거 수집 절차를 갖추고 있습니다. 민사소송법 제290조(증거신청의 채택여부)에 따르면, 법원은 당사자가 신청한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될 때엔 채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정보가 법원이란 통로를 반드시 거쳐야만 합니다. 살펴봐야 할 증거가 방대해질수록 '병목현상'이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김원근 변호사는 "디스커버리를 도입하면 법원이 들여다봐야 할 증거의 양도 크게 늘어난다"면서 "그때마다 일일이 승인 절차를 진행하면 경제적 비용이 커지는 건 물론이고 재판 기간도 길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증인 한명을 채택하는 데만 수개월이 걸릴 수 있는 환경에서, 광범위한 조사가 이뤄지는 디스커버리까지 법원의 통제를 거친다면 재판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단 점을 지적한 겁니다.

✚ 그럼 이 부작용들을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K-디스커버리가 국내 사법 체계에 안착할 수 있도록 연관 제도를 함께 손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소장과 답변서 단계에서 억지 주장을 걸러내는 '조기 기각 제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청구 내용이 법률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면, 본격적인 디스커버리 절차로 넘어가기 전에 재판장이 선을 그어 '찔러보기식 소송'을 사전 차단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소송 남용과 기업의 치명적인 정보 유출을 막을 수 있습니다."

✚ 증거 수집 절차도 개선이 필요하겠네요.
"물론입니다. '법원 중심'에서 '당사자 중심'으로 과감하게 바꿔야 합니다. 일일이 법원의 승인을 기다릴 게 아니라, 원고와 피고에게 증거 신청권과 주도권을 부여해야 합니다. 법원 개입을 최소화해야 디스커버리를 도입해도 재판이 기약 없이 늘어지는 병목현상을 경감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K-디스커버리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만, 제대로 안착할 경우 한국 사법 체계에 혁신이 일어날 것이란 점에선 김 변호사도 동의했습니다. 그가 K-디스커버리에 기대하는 부분은 '높은 합의율'과 '항소율 감소'입니다. 디스커버리 단계에서 모든 증거가 투명하게 공개되면, 당사자들은 자신이 승소할지 패소할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필요한 소모전을 피하고 조기에 합의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집니다. 오래된 자료이긴 합니다만, 미국에선 95% 이상의 사건이 디스커버리 절차 단계에서 합의로 조기 종결됐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문흥수 '증인신문방식의 개선과 미국식 준비절차의 도입필요성'ㆍ1994년).

김 변호사는 "디스커버리는 '정보 비대칭'이라는 견고한 장벽을 허물 수 있는 훌륭한 제도임엔 틀림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법 체계와의 호환성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으면, 오히려 재판을 지연시키고 소송 남용을 부추길 위험이 큽니다. 단순히 디스커버리라는 새로운 절차를 하나 추가하는 데 그쳐선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오래된 한국 민사소송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재설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K-디스커버리'가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겁니다."

이혁기 더스쿠프 기자
lhk@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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