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유산] 안동 봉정사 영산암

문정화 기자 2026. 4. 16.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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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를 덜어낸 담박한 정원
윤일현/시인·교육평론가
안동 봉정사 영산암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봉정사의 부속 암자다. 봉정사는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극락전(국보)과 조선 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웅전(국보)이 유명하지만 경북민속문화재로 등재된 '봉정사 영산암'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하늘에서 바라본 봉정사(사진 왼쪽)와 영산암 모습. 김진홍 기자 solmin@idaegu.com
생의 고뇌와 슬픔, 분노와 고통으로 마음이 제자리를 잡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고요한 사찰과 암자, 잘 가꾸어진 정원이나 숲을 찾는다. 눈앞의 풍경을 오래 응시하다 보면, 바깥을 향해 있던 시선이 어느 순간 내면으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그때 비로소 자기 존재의 가장 순수한 본질과 마주하게 된다. 고요와 정적은 결핍이나 공허가 아니라, 오히려 내면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순간이다.
스토아 철학은 인간이 외부의 소란을 벗어나 내면으로 물러날 때 비로소 평정에 이른다고 말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고요한 풍경 앞에 선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일이다"라고 했으며, 『법화경』 또한 "마음이 고요하면 세계 또한 고요하다"라고 일러준다. 세계가 변하지 않아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풍경은 전혀 다른 얼굴로 드러난다. 우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단순히 외부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고요를 매개로 번뇌를 씻어내며 맑아진 시선으로 다시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자연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지만, 그 정적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장 정직해진다. 그러므로 풍경에 젖어 든다는 것은 세속의 고통을 잊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 마주하는 가장 깊고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다.
봉정사 영산암은 자연과 건축, 인간의 삶과 철학이 조용히 맞물리는 한국의 10대 정원으로 꼽힌다. 이곳은 단순한 문화재를 넘어 한국적 세계관이 살아 숨 쉬는 장소다. 작위(作爲)를 덜어낸 이 담박한 정원을 가만히 거닐다 보면, 말없이 번져오는 법열 속에서 마침내 자신의 가장 깊은 심연과 마주하게 된다.
영산암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전각 6동 가운데 자리 잡은 마당 정원은 '한국의 10대 정원'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답다.
◆구조로 읽는 공간의 깊이
봉정사를 찾는 많은 사람이 안타깝게도 지척에 있는 영산암을 놓친다. 영산암은 봉정사 요사채를 지나 아래로 잠시 내려갔다가 다시 돌계단을 오르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완만한 상승과 하강의 동선은 방문자의 호흡을 자연스럽게 가다듬게 하며, 일종의 준비된 진입 과정처럼 기능한다.
돌계단을 오르면 입구 역할을 하는 2층 누각 우화루(雨花樓)가 나타난다. '꽃비가 내리는 누각'이라는 뜻을 지닌 이 건물은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전설에서 이름을 얻었다. 우화루는 아래를 통과해 들어가는 구조로, 봉정사의 만세루와 유사하지만, 더 낮고 좁아 몸을 자연스럽게 낮추게 만든다. 이 물리적 동작은 공간에 들어서기 전 마음을 낮추는 의식처럼 작용한다.
하늘에서 바라본 영산암
우화루를 지나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봉정사의 대웅전과 극락전이 평탄한 마당 위에 전각들이 펼쳐져 개방감을 준다면, 영산암은 비탈진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3단 구조의 입체적인 마당을 구성하고 있다. 하단에는 우화루가 자리하고, 가장 넓은 중단 마당에는 이끼 낀 바위 속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석등, 배롱나무가 어우러져 깊은 분위기를 형성한다. 상단에는 십육 나한상을 모신 응진전(應眞殿)과 삼성각이 마당을 내려다보며 공간의 중심축을 이룬다.
그 아래 위치한 '소나무와 바위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송암당(松巖堂)은 바위가 떠받들고 있는 소나무와 건물이 압도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맞은편에는 관심당(觀心堂)이 배치되어 있으며, 이 두 전각은 우화루 2층 누마루와 연결되어 공간적 연속성을 형성한다. 특히 영산암은 일반적인 사찰 전각의 엄숙함보다는 사랑채와 대문채를 갖춘 민가 양식의 친밀함이 배어 있어 더욱 정겹다. 이곳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과 '나랏말싸미'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영산암 우화루의 대청마루.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정원, '꾸미지 않은 완성'
영산암의 정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을 따르는 방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나무를 과도하게 다듬거나 돌을 인위적으로 배열하지 않고, 산세와 지형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건물을 배치한다. 이는 자연을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서양식 정원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이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자연을 설계한 흔적보다 자연 속에 사람이 잠시 기대어 있는 인상이 더 강하게 남는다.
건물은 풍경을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 환경에 스며든다. 특히 전각의 기단은 마당과 단절되지 않고 지면의 높낮이에 따라 스르르 몸을 낮추어, 어디까지가 마당이고 어디서부터가 건축의 시작인지 그 경계를 스스로 지워버린다. 마당의 흙과 돌, 낮은 기단과 이어지는 계단은 경계를 드러내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구성은 '인공을 지운 인공'이라 할 만하다. 의도를 감춘 채 완성된 공간, 그것이 영산암 정원의 핵심이다.
영산암의 정문을 겸하는 우화루의 작은 문. 허리를 굽혀 들어가면 전각과 마당이 어우러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닫힘 속의 열림, 시선을 설계한 공간 구조
영산암의 또 다른 특징은 공간의 밀도와 시선의 흐름에 있다. 작은 암자이지만 마당, 담장, 문과 창의 배치가 매우 정교하다. 마당은 완전히 평평하지 않고 미묘한 경사를 지니며 중심을 비워 두어 여백을 형성한다. 이 비어 있음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생각을 담는 자리다. 담장은 외부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다. 낮은 높이와 틈 사이로 바깥 풍경이 은근히 스며든다.
낮게 엎드린 우화루 누하주(樓下柱) 사이로 건너다보이는 마당은 정교하게 절제된 사각의 프레임 속에 자연을 담아내되, 보는 이의 발길에 따라 풍경의 농담을 달리하며 살아 움직인다. 창과 문 역시 시선을 의도적으로 끊거나 열어 주며, 걷는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구조는 한 장의 그림처럼 고정된 장면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이동에 따라 장면이 바뀌는 연속된 풍경을 구성한다. 결국 영산암은 공간이 아니라 경험으로 완성된다. 걷는 사람의 시선과 호흡까지 고려해 설계된 정원이라 할 수 있다.
영산암의 정원과 전각 6동의 모습.
◆사계와 수행이 만나는 곳, 시간까지 포함한 정원
영산암의 정원은 특정한 형태로 완성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다. 봄에는 주변의 매화와 산벚꽃이 은은하게 번지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이 공간을 감싼다. 가을에는 낙엽이 마당을 덮으며, 겨울에는 비움의 풍경이 또렷해진다. 이처럼 계절의 변화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정원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영산암에서는 '지금의 풍경'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 자체가 감상의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 이곳은 수행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마당은 장식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자리이며, 길은 이동이 아니라 의식의 전환을 위한 과정이다. 자연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성찰을 위한 거울이 된다. 이러한 특성은 영산암을 단순한 전통 정원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담은 공간으로 만든다. 화려함을 덜어낼수록 본질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이곳은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 영산암에 서면 특별한 장식이나 강렬한 조형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한참을 머물다 보면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것은 이 공간이 무언가를 더하기보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바꾸지 않고, 시선을 강요하지 않으며, 시간을 붙잡지 않는 정원, 영산암은 그렇게 조용히, 깊게 인간을 돌아보게 한다.
영산암 응진전 안에는 작은 법당에 비해 큰 체구의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정원에 잠겨 자신을 비우고 다시 길을 나서다
홀로 혹은 둘이서 영산암을 찾는다면 먼저 응진전 부처님께 삼배를 올려보라. 그런 다음 각자 떨어져 한 사람은 송암당에, 다른 이는 관심당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을 사이에 두고 간간이 눈길을 나누어보라. 바위 사이로 뿌리 내린 소나무와 암자를 감싸는 숲의 기척, 멀리서 스며오는 새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보라. 그러면 애써 붙들고 있던 생각의 타래가 하나둘 풀리고, 결코 놓을 수 없으리라 믿었던 부질없는 집착들이 서서히 힘을 잃는다.
열반이란 거창한 세계가 아니라, 이처럼 번뇌가 잦아들고 마음의 매듭이 스르르 풀리는 찰나의 평온일지도 모른다. '나'라는 경계가 희미해지고 바람과 빛, 그림자가 구분 없이 스며드는 자리에서 우리는 잠시 무아(無我)의 경계에 닿는다. 풍경은 그대로지만, 바라보는 나는 이미 이전과 다르다.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조급함도, 무엇을 붙잡아야 한다는 강박도 그 순간에는 힘을 잃는다. 남는 것은 지금 이 자리에서 숨 쉬는 존재로서의 자신이다. 아무것도 더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 고요한 충만함이 마음을 가만히 채운다.
영산암에서 한국 정원의 정수를 음미하며 그 풍경에 온전히 몸을 맡겨보라. 맑은 날에는 햇살이 사물의 윤곽을 부드럽게 씻어내고, 비 오는 날에는 낙숫물 소리가 정원을 깊은 울림으로 묶어낸다. 중요한 것은 날씨가 아니라, 그 풍경 앞에 선 마음의 상태와 자세다.
이 고요한 정원은 무엇을 보여주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머물며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그 앞에 앉아 있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면을 비추어 보고, 얽혀 있던 번뇌의 마디를 끊어낸다. 그렇게 자신을 비워낸 뒤에야 우리는 세상으로 내려갈 준비를 마친다. 이곳에서 얻는 것은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소박한 힘이다. 영산암은 말없이 우리를 붙들어 세운 뒤, 다시금 담담히 인간 세상의 길 위로 돌려보낸다.

윤일현/시인·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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