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F 400조원 시대 열렸지만…운용사 베끼기·치킨게임 여전
상품 다양화·구조 개선 시급…액티브 확대·양극화 개선해야
(시사저널=오유진 기자)

국내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이 400조원 시대를 열며 유례없는 호황을 맞고 있다. 정부의 국내 증시 저평가 해소 정책과 함께 코스피 6000포인트를 달성하면서 국내 증시로 대규모 자금이 유입된 영향이다. 그러나 가파른 외형 성장 이면에서는 자산운용사 간 과도한 베끼기 경쟁과 수수료 치킨게임이 만연해지면서 시장의 질적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6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상장된 ETF의 순자산 총액은 전 거래일인 15일 종가 기준 404조원을 돌파했다. 2023년 100조원을 돌파한 이후 3년 만이자, 지난 1월5일 300조원을 돌파한 지 100여 일 만에 100조원이 추가로 유입되며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ETF 시장으로 뭉칫돈이 몰려든 건 지난해부터 이어진 국내 증시의 활황 영향이 크다. 개인 투자자들이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개인형 퇴직연금(IRP)에 이어 최근에는 국내시장 복귀계좌(RIA)까지 동원해 국내 주식형 ETF를 대거 매수하고 있어서다. 이재명 대통령도 대선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5월 국내 지수추종 ETF를 매수했다고 밝히는 등 투자 열풍에 힘을 보탰다.
다만 시장으로 자금이 대거 유입되는 것과 달리 ETF 시장의 질적 성장은 제자리걸음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투자자 수요가 집중되는 인덱스·지수추종 등 패시브 ETF 위주로 신상품이 쏟아지면서 상품 간 차별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액티브 ETF조차 반도체·조선 등 주요 테마를 위주로 유사한 상품이 반복 출시되며 사실상 '복제 상품'이 난립하는 상황이다.
최근 미국의 스페이스X 기업공개(IPO)를 계기로 우주·항공 테마 투자 수요가 확대되자 관련 ETF가 동시다발적으로 출시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미국 우주·항공 관련 ETF는 지난해 11월 하나자산운용이 '1Q 미국우주항공테크'로 처음 출시됐는데, 최근 한 달 사이 삼성자산운용·한국투자신탁운용·미래에셋자산운용이 해당 상품과 유사한 구조의 상품을 잇따라 출시하면서 '베끼기' 논란이 불거졌다.
권민경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보고서를 통해 "테마형 ETF는 특정 트렌드에 기반해 단기간 자금을 유치하는 특성이 있지만, 시장 관심이 약화되거나 새로운 트렌드가 등장하면 자금이 빠르게 빠져나가 손실을 보는 투자자가 늘어날 수 있다"며 "운용사 간 과도한 경쟁과 광고가 투자자를 오도하지 않도록 금융당국의 세심한 감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같은 상품으로 '최저 보수' 경쟁…출혈만 심화
상품 경쟁력이 떨어지니 수수료 경쟁에만 매몰된다는 점도 ETF 시장의 고질적인 문제로 꼽힌다. 자산운용사들이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해 총보수를 낮추는 '제 살 깎아먹기'식 경쟁에 나서면서다. 총보수가 낮아지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비용 부담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지만, 상품 유지에 필요한 비용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해 장기적으로는 조기 상장폐지 등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이 같은 보수 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신규 ETF 출시 전 보수를 인하할 경우 당국과 사전 협의를 거치도록 하는 지침을 마련했다. 다만 상품별 보수는 운용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영역인 만큼 강력한 규제를 적용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렇다 보니 ETF 시장의 양극화도 점차 심화되는 분위기다. 대형 자산운용사로 자금이 쏠리면서 중소형 운용사들은 상품이 아닌 수수료 경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굳어진 탓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업계 1위 삼성자산운용의 시장 점유율은 약 40%, 2위 미래에셋자산운용은 31.9%로 두 회사가 전체 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ETF 시장이 400조 시대를 맞아 질적 성장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목소리가 커진다. 특히 국내 증시 저평가 해소를 넘어 선진 증시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ETF를 통한 자금 순환이 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이뤄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단순 지수추종 중심에서 벗어나 액티브 ETF 비중을 확대하며 상품 다양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일본 역시 2018년부터 ETF 시장조성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중소 운용사의 유동성 확보를 지원하는 등 시장 구조 개선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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