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의 삶, 깨달음서 시작”…호북성 황매현의 도신과 홍인선사 [정용식의 사찰 기행]
한국 불교 뿌리를 찾아서 (3)

14세 동자승이 당당하게 승찬대사를 찾아와 묻는다.
“해탈하는 법문을 알려주십시오”
승찬이 물었다.
“누가 너를 묶어 두었는가?”
동자승은 “아무도 속박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무슨 해탈을 따로 구하려고 하느냐?”
승찬의 말에 크게 깨달은 동자승은 제3조 승찬의 정법을 잇게 됐으니 바로 4조 도신이었다. 안휘성 잠삼현의 삼조사에는 승찬이 수행했던 삼조동 옆에는 이렇게 3조 승찬과 4조 도신이 만난 해박(解縛)바위가 있다.
도신이 주석했던 호북성 황매현에 있는 사조사는 안휘성 잠삼현의 삼조사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이동해야 한다. 안휘성과 호북성의 양 경계 지점에 잠삼현과 황매현이 있는 것이다. 황매현에는 도신스님의 정각선원(사조사)과 홍인스님의 서풍선원(오조사)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

황매현 쌍봉산을 좌우로 도신의 서산산문(사조사)과 홍인스님의 동산산문(오조사)이 열렸고 이는 중국 선종 역사상 처음 개설된 산문들이다. 중국 선종이 산중에서 좌선을 중심으로 수백명의 제자들을 지도해 공동체적 수행 전통이 형성되고 비로소 교단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선종이 들어온 신라 말기(9세기)부터 고려 초기에, 교종이 지배적인 신라 수도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산속에 9개 선종의 주요종파(산문)가 생겨났다.
당나라로 유학 하러 갔던 신라의 승려들이 달마대사의 선법을 접하고 이를 수용한 아홉 교파 구산선문(九山禪門)인 것이다.

도신스님은 7살에 출가해 사미승이 됐고 14세 때 승찬에게서 불법을 배우면서 13년 동안 승찬을 모셨다. 승찬대사로부터 의발을 전달받아 4조가 된 도신은 홀로 돌아다니며 수행하다 45세경에 쌍봉산에 쌍봉사(사조사)를 세우고 이곳에서 30여년 동안 불법을 전해 쌍봉도신(雙峯道信)이라 불렸다.
의술이 뛰어났다고 해 대의도신(大醫道信)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도신스님은 황매현에서 많은 문하생을 거느리고 설법하면서 노동에 의한 자급자족 체계 확립(선종일치, 좌선과 노동의 결합)이라는 공동체적 집단수행을 시작하는 ‘서산법문’을 새로 세워 선종의 교단과 사상을 체계화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도 마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선종의 청규가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청규(淸規)는 수백명의 스님들이 공동생활하게 되면서 승가의 화합과 질서를 위해 제정된 것이다.
아마도 의식주 해결을 위해선 불가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8조 마조도일의 제자 백장회해(749~814년)선사가 자급자족형 사찰 운영을 위해 스님들이 지켜야 할 여러 규범과 제도를 제정한 백장청규(淸規)가 있는데, 후대 정리된 내용들이 우리나라까지 전달돼 사찰 운영의 규범이 됐다.
일제 강점기 한국 근대불교 혁신을 위해 힘썼던 백학명 선사가 정읍 내장사 주지를 맡아 반농반선(半農半禪)을 사원 운영 원칙으로 삼았고,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도 여기에 함께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신의 선(禪)사상은 제자들로 이어져 신라시대 법랑스님도 이를 받아 한국의 구산선문 가운데 경북 문경 봉암사의 ‘희양산문’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도신이 창건해 1400년의 역사를 지닌 사조사(정각선원)는 중국 선종에서 처음으로 수백명의 대중이 단체생활하며 노동과 참선을 병행하는 사원으로서 당시에 중국에서 규모도 가장 크고 유명한 사찰이었다.
그러나 중국 문화혁명(1966~1976년) 당시 완전 폐허로 변했다가 현대에 와서 200여칸을 세워 옛 모습을 복원했다.

절에 들어가니 석가모니부터 2조 마하가섭, 3조 아난존자, 28조 달마대사, 29조 혜가선사, 31조 도신선사, 33조 혜능대사까지 인도에서 중국으로 이어온 33명 선사의 선종 계보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3조사와 마찬가지로 관광지보다는 수행 중심의 조용한 절간이지만 삼세불과 18나한이 있는 대웅보전의 규모가 엄청나다.

사조전에는 4조 도신스님의 흉상을 모시고 있었고 도신스님의 존상 상단에는 자운혜우(慈雲惠雨)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도신선사의 뜻을 기리는 ‘자비가 구름처럼, 지혜가 비처럼’이라는 뜻일 것이다.
가람전에는 도교의 영향에 의한 관우상이 모셔져 있고 대웅전에서 10분 올라가면 열반탑도 있다고 한다.

4조 도신이 선법을 펴며 황매현에 갔을 때 우연히 7살이라고 전해진 골상이 뛰어나고 기특하게 생긴 한 소년을 만나자 호기심에 물었다.
“네 성이 무엇이냐?”
소년은 “성이 있으나 흔한 성이 아닙니다”고 했다.
“그래 무슨 성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저는 불성입니다”
도신이 놀라 말했다.
“그럼 너는 성이 없구나”
소년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원래 불성은 공(空) 하다고 했습니다.”
도신은 그 말에 매우 놀라 시자를 부모에게 보내 출가를 권했다.
그 소년은 30년 동안 도신 곁을 지키다 5조가 된 홍인대사였다.

홍인선사는 황매현 사람으로 7세에 도신선사를 따라 출가해 13세에 승려가 돼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좌선하는 규정을 실행하며 수행하다 50세에 도신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도신의 쌍봉산 동쪽 10㎞ 떨어진 풍무산에 도장을 만들어 법문을 펼쳤는데 쌍봉산을 서산(西山) 풍무산을 동산(東山)이라 불러 홍인의 산문을 ‘동산 산문’이라 한다.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열어 수백명의 탁월한 선종의 제자들을 배출해 선종의 대중화를 끌어냈다.
제자 중 혜능(惠能)과 신수(神秀, 606~706년)라는 걸출한 인물이 배출돼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됐다.
홍인의 법통은 신수가 아닌 육조 혜능으로 이어졌다.

오조사에는 ‘수본진심(守本眞心)’이 현판으로 걸려 있다. 이는 홍인대사의 선(禪)사상이 ‘본래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수행의 초점’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쌍봉산의 사조사’와 인접한 황매현 오조사 서풍선원은 홍인선사가 직접 창건했는데 쌍봉산 동쪽에 위치해 동산사로 불리기도 했다.
홍인대사 당시 “천하의 승려와 신도들이 열에 아홉은 참배했다”고 할 정도로 승려가 1000여명이 넘는 큰 절이고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여 ‘천하조정(天下朝庭)’이라 불리기도 했다.
1938년 일본군 폭격을 당했다가 재건됐다.

웅장한 오조사 일주문에는 홍인의 뒤를 이을 6조를 결정지은 걸출한 두 제자인 수제자 ‘신수대사’와 글자도 모르는 무지렁이 행자 ‘혜능대사’의 게송(偈頌)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몸은 보리수와 같고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도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도록 해야겠네
신수의 게송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인데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낄 것인가?
혜능의 게송
이후 북종선으로 대표되는 신수대사의 점오(漸悟, 점진적인 수행)사상과 혜능대사의 남종선으로 대표되는 돈오(頓悟, 단번에 깨달음) 사상을 표현하는 내용이 된 것이다.


대웅전을 지나오니 홍인의 어머니상을 모신 성모전(聖母殿)이 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홍인대사의 위대함을 칭송하며 그 어머니에게 성모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홍인대사 육신 등신불이 모신 법당에도 직접 글씨를 내릴 정도로 실제 홍인대사에게 존경을 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이라 쓴 현판이 법당 홍인존상 위에 걸려있었다.

법당 뒤쪽 좁은 공간에 옻칠로 부패를 방지한 검은 얼굴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어 한 사람씩 참배를 한다.

오조사 경내 계단 길 건물 노랑 벽면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그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의 ‘금강경 제10분’에 나오는 글귀인데 대승불교의 공(空)함을 깨닫는 내용이라 한다.

출가 전 혜능이 어느 날 집으로 가는 중 주막집에 들렀다.
방에서 한 손님의 경(금강경)을 읽는 소리 중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구절을 듣고 마음이 홀연히 열려 손님에게 “어디서 그런 경을 구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스님은 혜능에게 ‘황매현에 홍인대사에게 가서 깨달음을 구하라’ 일러줘 30일을 걸어 황매현에서 홍인대사와 마주했다.
대사가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구하려 하느냐’고 물으니 혜능은 “저는 영남의 신주라는 곳에서 왔는데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라고 답했다.
대사가 물었다.
“그곳은 오랑캐가 사는 지역인데 어찌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느냐?”
혜능이 되물었다.
“사람은 남쪽 사람 북쪽 사람 구별이 있겠으나 어찌 불성에 남북의 구별이 있겠습니까?”
홍인은 혜능의 그릇의 됨됨이를 알아봤으나 주위 제자들이 시기할까 해서 “나가서 방아나 열심히 찧어라”고 했다.
혜능은 8개월간 오조사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었다.
8개월 뒤 홍인대사가 혜능을 찾아와 “혹 나쁜 사람들이 너를 시기해 헤칠지 몰라 짐짓 모른 체 했다. 네가 이 뜻을 아느냐”라며 제자로 받아들였다.

오조사 육조전 한편에는 혜능이 방아를 찧었다는 방앗간을 보존하고 있다.

혜능스님 존상 상단 현판에는 의발친전(衣鉢親傳)이라 쓰여 있다.

5조 홍인대사가 6조 혜능대사에게 의발을 몸소 전해주며 선 법 맥을 전수한 곳이라는 뜻인 듯하다.

육조전 옆 마당에는 홍인대사가 심었다는 청담나무가 1500년 역사를 버티며 자리를 지키고 있어 역사의 기운을 받아보고자 나무에 몸을 의탁해 본다.

오조사에는 6조 혜능대사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다. 비풍비번(非風非幡)에서 유래한 화두로 두 스님이 나부끼는 깃발을 보며 “바람이 움직인다”,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논쟁을 벌이자 혜능대사가 “바람도 깃발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인다”고 정리한 내용이다.
홍인으로부터 선법을 계승받아 6조가 된 혜능대사는 계승자가 되지 못한 홍인대사의 수제자 신수대사와 그 제자들의 위협을 피해 양쯔강 건너 도망을 갔다.
호북성 황매현에서 고향이 있는 광동성까지 몇천 리 길을 혜능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갔을까.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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