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 '최초 은행' 타이틀 슬그머니 내려놓은 속사정

문룡식 기자 2026. 4. 1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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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대한천일은행으로 시작…한성은행보다 2년 늦어
해묵은 '최초 싸움' 끊고 실리 선택…127년 헤리티지 강조

우리은행이 오랜 기간 브랜드 정체성 핵심으로 내세웠던 '우리나라 첫 은행' 타이틀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고종 황제의 유지를 이어받아 민족 자본을 지켜왔다는 독보적인 자부심은 계승하되, 해묵은 '최초 은행' 논쟁에서는 한발 물러나 실용적이고 담담한 정체성 재정립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지난 2021년 '우리 마음속 첫 번째 금융'이라는 그룹 비전을 선포한 이후, 광고와 브랜드 메시지에서 기존에 내세웠던 '우리나라 첫 은행'이라는 표현을 서서히 지워왔다.

우리은행이 '가장 오래된 첫 번째 은행'이라는 강력한 마케팅 무기를 내려놓은 배경에는 역사적 실증이라는 피할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우리은행 전신은 1899년 1월 30일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이다. 이곳은 일본계 은행들이 국내 상권을 잠식하며 경제 주권을 위협하던 상황에서, 민족 자본의 중요성을 절감한 상인층이 주도해 만들었다.

당시 고종 황제는 내탕금 3만원을 하사해 창립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1902년에는 황실이 직접 주주로 참여하고 영친왕이 2대 은행장에 취임하며 명실상부한 민족 은행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에는 앞선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조흥은행 전신)의 벽이 높았다.

한성은행은 1897년 1월 8일 설립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정부 설립 인가를 받은 은행이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1909년 설립)보다도 무려 12년이나 앞선다. 결국 설립 연도상 우리은행은 한성은행보다 2년 늦게 출발한 셈이다.

이 때문에 과거 조흥은행이 건재하던 시절 두 은행은 '원조' 자리를 두고 필사적인 자존심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우리은행은 '중단 없이 민족 자본의 맥을 이은 정통성'을 강조하며 맞섰지만, 1897년이라는 설립 시점의 선후 관계는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족보 대신 이름 택한 '신한'…반사이익 얻은 우리은행

격렬했던 시시비비는 2006년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을 흡수합병하면서 묘한 국면을 맞이했다. 신한은행은 조흥의 129년에 달하는 국내 최장 족보를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통합 출범 이후 조흥 역사보다 '신한'이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는 길을 택했다.
정상혁 신한은행장이 지난해 7월 7일 서울 중구 본점에서 열린 '제43주년 창립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신한은행]

실제로 신한은행의 창립기념일 변천사는 이러한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2006년 4월 1일 통합은행 출범 당시, 신한은행은 조흥의 110주년 대신 통합 기념일인 4월 1일을 창립일로 정해 2021년까지 유지해 왔다.

그러다 2022년 진옥동 당시 은행장(현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주도로 창립기념일을 다시 7월 7일로 변경했다. 이는 조흥의 1897년이 아닌, 1982년 설립된 옛 신한은행의 창립 40주년을 기리기 위한 선택이었다.

신한은행이 족보를 캐비닛에 넣어두고 '신한' 정체성을 강조한 덕분에 우리은행은 반사이익을 얻었다. 경쟁자가 스스로 역사를 뒤로 뺀 틈을 타 우리은행이 '우리나라 첫 은행'이라는 문구를 대대적으로 사용하며 역사적 지위를 누려온 것이다.

공격적인 마케팅의 결과, 지금까지도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 첫 번째 은행이 우리은행이라는 인식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은행이 '최초' 타이틀을 스스로 내려놓은 것은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실질적인 신뢰를 쌓겠다는 선택으로 풀이된다.

대신 우리은행은 '누가 먼저인가' 보다 '어떤 뿌리를 가졌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구한말부터 이어온 127년의 유구한 전통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강조하는 모습이다.

실제 최근 우리은행이 한 유명 유튜브 채널에 출연했을 때도, 고종 황제 도움을 받아 1899년 설립된 은행이라는 점을 홍보하는 데 상당 분량을 할애했다.

또한 지난해 12월에는 본점 지하 1층 은행사박물관을 재단장해 '우리1899'로 개관했으며, 인천지점과 종로지점 등 100년 이상 역사를 지닌 거점들을 브랜드화하며 '대대로 믿고 맡길 수 있는 은행'이라는 신뢰감을 구축하고 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현재 사용하는 브랜드 슬로건은 2021년 우리금융지주 재출범을 기리는 의미와 함께 당시 코로나19 시국 하에 소비자 마음에 더 다가갈 수 있는 문구를 채택한 것"이라며 "슬로건과는 별개로 우리은행의 127년 헤리티지(전통·유산)는 계속 이어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신아일보] 문룡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