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바다 향한 민간잠수사 마음에 새겨진 ‘국가폭력’…“고통은 진행중”
‘12년, 의인들의 시간: 세월호 민간잠수사 이야기’
진도 팽목항의 바다는 고요했다. 그러나 이 바다를 오래 바라본 사람들에게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항(현 진도항)은 여전히 2014년 4월, 그날의 ‘참사’와 맞닿아 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12년. 많은 이들이 그날을 잊지 않고 아이들을 떠올리며,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준 ‘의인’들을 기억한다. 세월호 참사 현장으로 달려갔던 민간잠수사들 말이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들은 25명의 민간잠수사들이 팽목항으로 달려왔다. 이들은 군·경과 함께 약 석 달 동안 바다에 들어가 희생자 수습 작업을 벌였고, 292명의 희생자를 가족 곁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의인이라 불려야 할 이들이 맞닥뜨린 것은 찬사와 예우가 아니었다. 남은 것은 몸의 병과 마음의 상처, 생계의 위협, 제도의 외면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12년이 지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한겨레는 민간잠수사들이 걸어온 시간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되짚었다.
“손으로 더듬으니 머리가 잡히더라”
황씨는 2014년 4월 세월호 현장, 그 바다 속으로 들어갔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시야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랜턴을 비춰도 구명조끼가 희미한 붉은 색으로 보일 정도였다. 결국 손을 사용해야 했다. “더듬으니까 머리가 잡히더라고요. 내가 주체가 안 되더라고. 아이들이 이렇게 될 상황이 아닌데…. 너무 화가 나고 감정 주체를 못 해서 소리 지르고 울었던 기억이 나요.”

산업 잠수로 잔뼈가 굵은 이들에게도 세월호 현장은 견디기 어려운 바다였다. 전국에서 손꼽히게 조류가 센 맹골수도, 궂은 날씨, 제한된 물때, 보이지 않는 선체 내부,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희생자를 수습해야 했던 상황까지. 민간잠수사 김순종(75)씨는 “그 얼굴을 봤을 때는 그걸 말로 어떻게 표현을 못 하겠다”고 했다. 바다 속은 작업 현장이 아니라 참혹한 재난, 그 자체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유가족들이 현장을 지키고 있었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병주씨는 당시 바지선에 붙어 있던 현수막 문구를 기억한다. “당신은 우리 아이들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각종 유언비어와 민경욱 당시 청와대 대변인의 ‘시신 한 구 당 500만원’ 발언에 상처를 입고 현장을 떠나려던 민간잠수사들의 마음을 붙잡은 것은 결국 유가족들이었다.
‘죽음 각인’ 그러나 더 큰 고통은 그 이후

정신적 충격도 컸다. 민간잠수사들은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을 몸으로 기억하게 됐다. 정혜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당시 민간잠수사들의 상태를 “심리적으로 다 주저앉아 있는 상태, 무력감의 끝, 분노의 끝”이라고 표현했다. 민간잠수사들에게는 악몽과 불면, 죄책감이 오래 남았다.
“내가 한 명이라도 더 데리고 나올 수 있었는데….” 그 죄책감은 합리적 책임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마주한 사람에게 남는 ‘죽음의 각인’ 이었다. 그러나 민간잠수사들을 더 오래 붙잡은 것은 물 속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의 표현대로라면, 더 큰 고통은 ‘그 이후’에 왔다.

“그동안 수고했다” 계약 해지 통보
황병주씨는 그 문자를 받고 “너무 참담했다”고 했다. 미수습자가 11명 남아 있었고, 끝까지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문자 한 통으로 현장에서 배제됐다.
그날의 통보는 민간잠수사들에겐 단순한 ‘계약 해지 통보’가 아니었다. 끝을 보지 못했다는 허망함, 남은 희생자들을 두고 나와야 했던 죄책감, 그리고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배신감이 겹쳐졌다. 황씨는 “그전까지는 고생도 보람으로 버텼는데 그렇게 되고 나니 국가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고 했다. 그런데 이 통보가 끝이 아니었다.

동료를 잃었는데, 책임은 민간잠수사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가, 구조 작업 중 발생한 사고의 책임을 오히려 현장에 있었던 민간잠수사들에게 돌렸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본인들이 수습하지 못한 참사에 발 벗고 나선 의인들에게 정작 사고가 나자 행정기관들이 한 목소리로 ‘현장의 책임자가 누구였지? 우리 아니었잖아’라고 말하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결국 1심과 2심, 대법원까지 이어진 재판에서 공우영씨는 2017년 1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기소된 지 2년 5개월 만이었다. 그러나 민간잠수사들에게 남긴 충격은 컸다. 황병주씨는 “총괄 책임은 해경이 지고 있었는데, 공우영 민간잠수사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라고 말했다. 구조의 한가운데 있었던 이들은, 구조 이후 책임의 가장 앞줄로 끌려나왔다.

세월호 수습 활동, 훈장이 아닌 낙인
다른 현장에서는 세월호를 다녀온 민간잠수사를 꺼렸다. 몸이 망가졌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결국 김순종씨는 2015년부터 잠수 일을 하지 못하고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지금 그의 사실상 유일한 수입은 노령연금이다.
황병주씨 또한 골괴사로 현업에 복귀하지 못했다. 수술을 하면 영영 잠수 일을 하지 못할까 수술도 하지 못했다. 대리기사와 지인 회사를 전전하며 일했던 그는 현재 무직 상태다.
김수영 변호사는 “세월호 현장에 다녀왔다는 것이 훈장은커녕 낙인처럼 돼 산업 현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대다수 민간잠수사들이 산업 현장에 복귀하지 못했고, 대리운전이나 막노동, 일용직으로 흩어졌다. 민간잠수사들에게 세월호는 ‘의로운 행동’의 증거이기보다, 다시는 현장에서 부르지 않겠다는 배제로 작동했다.

고통은 분명한데 제도는 없었다
황병주씨는 “보통 잠수병은 마지막(으로 일했던) 잠수 현장에서 산재 처리를 해주는데 우리는 마지막 현장이 세월호 (수습 현장이)다 보니까 (해경에서) 산재 처리를 못 받았다”고 말했다.
김순종씨는 법적 다툼 속에 2022년 세월호 수습 활동이 아닌 이전의 잠수 활동으로 인한 산재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장해등급은 소멸시효를 이유로 불승인됐다. 골괴사 진단을 받은 다른 민간잠수사들은 아직도 산재 인정을 받지 못했다.
황병주씨를 비롯한 7명의 민간잠수사들은 골괴사를 보상등급 판단에서 제외한 것은 부당하다며 행정소송을 냈다. 그러나 2020년 4월에 패소했다. 김수영 변호사는 당시 잠수 기록 자체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던 점을 문제로 지적했다. 얼마나 많이, 얼마나 급박하게, 어떤 상태로 잠수했는지를 입증할 기록이 불분명했다는 것이다. 기록은 국가가 남기지 않았고, 그 빈틈의 책임은 다시 민간잠수사들에게 돌아갔다.
국가 편의주의로 트라우마 심화
치료비 지급은 9개월 만에 재개됐지만, 끊긴 시간까지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 사이 민간잠수사들의 정신적 외상은 악화됐다. 황병주씨는 불면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수면유도제를 꺼내보이며 그는 “치료비가 끊겨 그동안 받던 트라우마 치료를 받지 못하자 불면이 더 심해졌다. 나중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보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상까지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떻게 죽을까, 이 생각만 했다”고 했다.
그 무렵 민간잠수사들을 붙잡아준 사람이 정혜신 전문의였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소개로 집단상담을 시작한 뒤, 황병주씨는 “어떻게 죽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없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더 큰 건, 그 이후 국가의 폭력이었다”
그는 “물속에서 아이들을 껴안고 올라왔을 때 받은 외상을 ‘원발성 트라우마’라고 한다면, 그 이후 국가에게서 받은 외상이 사람을 완전히 무릎 꺾게 하는 더 결정적인 트라우마”라고 설명했다. “내가 죽을 만큼 고생해서 살아 나왔는데, 그것을 전혀 다르게 여기는 가까운 존재의 반응”이 더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이다. 민간잠수사들에게 그 ‘가까운 존재’는 국가였다.
명예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2015년 5월30일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민간잠수사 김관홍씨가 발언대에 서서 해경이 준 감사장을 찢었다. “저희가 7월10일 쫓겨나고 해경에게 받은 것이 있습니다. 감사장. 감사하대요.” 감사는 말뿐이고, 책임도 예우도 없었다는 절규였다.
결국 극심한 고통 끝에 2016년 6월 김관홍씨는 세상을 떠났다. 직후 민간잠수사 지원 내용을 담은 이른바 ‘김관홍법’이 발의됐다. 그러나 당시 야당인 자유한국당의 반대 속에 4년 동안 계류하다 2020년 5월21일 원안에서 후퇴된 안이 겨우 통과됐다. 피해자 지위는 협소하게 인정됐고, 의사상자 간주 규정도, 골괴사의 현장 재해 인정도 빠졌다. 법은 생겼지만 충분한 답이 되지 못했다.

“의인들의 외상은 현재도 진행 중”
그런데 그는 3년 전 또다른 변화를 겪었다. 해경은 윤석열 정부 시기에 치료비 지급 지침을 바꿨다. 이전에는 세월호 수습 활동과 인과관계가 인정된 질환에 대해 자비 부담 없이 치료비를 지급했지만, 2023년부터는 민간잠수사들이 먼저 비용을 부담하고 이후 심사를 거쳐 지급 여부를 판단하도록 했다는 게 황병주씨의 설명이다. 이 때문에 세월호 수습 현장에서 악화된 허리 디스크에 대한 치료비는 지급이 불승인됐다.
지침 변경 이후 불승인 사례는 늘고, 지급액은 줄었다. 한겨레가 입수한 ‘해경의 지침 개정 보고(요약)’ 문서를 보면 “잠수병 치료를 9년간 받는 것은 통상 이해하기 어렵고 현재 현업에 종사하는 등 의심의 여지가 보인다”고 명시돼 있다. 치료의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과잉진료를 막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다.
황병주씨는 “이의제기를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고, 허리 디스크는 그냥 자비로 치료하고 있다. 나을 때까지 치료해준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바뀌니 너무 화가 난다”고 말했다. 정혜신 전문의는 이 지침 변경 자체가 “외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본다. 12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는 행정 편의적인 국가의 태도가 민간잠수사들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침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한겨레가 이 지침을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묻자 해경은 이렇게 설명했다. “특별재난 청구 의료 시스템으로 세월호 수습 작업과의 인과관계를 판단하지 않고 지급하던 치료비를, 인과관계를 판단해 좀더 세밀하게 지급하기 위해 2023년부터 심사위원회 심의를 통해 승인 절차를 거치도록 했다. 개인이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게 어렵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세월호와의 연관성이 증빙이 돼야 치료 지원을 해줄 수밖에 없다. 세월호와 연관성이 확인된 질환은 완치될 때까지 치료지원을 해줄 계획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또 달려갈 거에요”
의인들은 국가에게서 예우받지 못했고, 제도 안에 온전히 편입되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책임과 낙인을 떠안았다. 그러나 그날 바다로 향했던 마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마음 때문에 더 오래 고통받았지만, 그 마음 때문에 아직도 버티고 있다고 했다.

팽목항에서 만난 4·16세월호가족협의회의 김재만씨는 민간잠수사들을 떠올리며 “정부에서 못하는 일을 해준 분들께 국가가 너무 심하게 했다. 내가 그분들 입장이라면 그 시커먼 바다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분들도 이후 트라우마로 고생하시는데…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건강하셨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수영 변호사는 “소송을 이기지 못했고, 법률 개정도 충분히 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울먹였다. 정혜신 전문의는 “국가가 민간잠수사들에게 어떻게 작동했는지 알아야 한다. 인정하고 사죄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12년. 선체는 녹슬어갔지만, 민간잠수사들의 기억은 닳지 않았다. 아이들을 껴안고 올라오던 그들의 몸은 병들었지만, 그날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국가는 그 시간을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가. 그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조성욱 위준영 피디 ch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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