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서 길어올린 푸근한 삶… 숨고 싶을때 떠나는 섬[박경일기자의 여행]
긴 백사장 인근 2500그루 해송
동쪽해변엔 낭만적인 갯돌 소리
전국 다시마 절반 생산하는 바다
해안가 ‘용굴’ 근육질 바위 감탄
거대한 자연 통째 누릴 수 있어
200m 다리로 연결된 ‘소랑도’
대교 송덕비·효행비가 반겨줘
두 개 비석에 새긴 사연 뭉클
벽보하나 붙인 유일한 막걸리집
가벼운 맛·은은한 누룩향 ‘일품’

금일도(완도)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오래전의 일이다. 전남 완도의 섬 생일도를 취재해서 쓴 여행기사가 나간 뒤 독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대뜸 시비조다. “왜 생일도만 기사로 쓰는 거요.” “예? 실례지만 어디신데요.” “금일도요, 금일도.” 금일도라면 생일도와 이웃한 섬이다. 이야기인즉슨 “금일도가 생일도보다 훨씬 좋은데, 왜 생일도만 취재해 썼느냐”는 힐난이었다. 쓴 기사를 놓고 항의는 받아봤어도, ‘안 쓴 기사’로 항의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금일도에 어떤 명소가 있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기자 양반’이 찾아야 하는 게 아니냐”고 되묻는다. 그러고는 다시 ‘왜 금일도는 안 쓰고 생일도 얘기만 쓰냐’며 막무가내다. “언제든 금일도에 가보고서 기사를 쓰겠다”고 하니 그제야 말투가 사뭇 누그러졌다. 그렇게 약속 아닌 약속을 하고 금일도를 ‘가봐야 할 곳’ 리스트에 올렸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다녀오지 못했다. 금일도에는 뭐가 있을까. 금일도 주민은 왜 그런 전화를 했을까. 지금부터의 얘기는 금일도에 다녀와서 쓰는 여행기이자 뒤늦게나마 지킨 약속 얘기다.
# 평일도냐, 금일도냐. 헷갈리는 지명
섬 이름 얘기부터 해야겠다. ‘평일도’는 공식 행정지명이다. 그런데 섬 주민 중에 그렇게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섬은 ‘금일도’다. 금일도와 평일도. 하나의 섬이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섬 지역의 행정 개편 과정에서 면 단위 통합과 분할을 거듭하다가 벌어진 혼란이다.
섬은 보통 면(面) 단위 지명과 호환된다. 생일도는 생일면, 금당도는 금당면 이런 식이다. 그런데 섬과 섬을 합쳐 면 단위를 신설하면서 ‘금일’이란 지명이 만들어졌다. 금당도의 ‘금’ 자에다 평일도·생일도의 ‘일’ 자를 붙여서 ‘금일읍’이란 행정지명이 만들어진 것. 금일읍의 중심이 평일도였으니 평일도는 ‘금일도’로도, ‘평일도’로도 불리게 된 것이다. 이제 두 개의 섬 이름이 익숙해졌는지 섬 주민도, 행정도 딱히 고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불편한 건, 금일도를 찾는 몇 안 되는 외지인이나 여행자들뿐이다.
금일도와 자주 비교되는 건 가까이 이웃한 섬, 생일도다. ‘항상 오늘인 섬 금일도’ ‘날마다 생일인 섬 생일도’란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금일도와 생일도는 함께 거론되고 자주 비교된다. 금일도가 훨씬 더 크긴 하지만, 둘 다 제법 큰 섬이라는 것도 비슷하고 둘 다 약산도 당목항에서 배를 타고 간다는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 빼고는 금일도와 생일도는 참 다르다. 당목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닿는 금일도 일정항의 섬 소개 간판에는 ‘복잡한 해안이 마치 두족류 같은 모습’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섬의 형상이 낙지나 주꾸미처럼 생겼다는 뜻이다. 높은 산이 없고 대부분 완만한 평지와 구릉으로 이뤄진 금일도는, 지도로 보면 화선지에 번진 먹처럼 비정형적이다.
반면 생일도는 한가운데 산이 솟아있어 섬 전체가 ‘산 하나’처럼 보인다. 산지가 많아서 경작할 땅이 별로 없는 데다 해안 지형이 단순해서 얕은 바다가 없으니 양식업도 성하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금일도는 양식장도 많고, 경작지로 삼을 만한 평지 땅이 많다.
여러모로 금일도는 생일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세가 당당하다. 인구부터 경제규모, 기반시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다 그렇다. 그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게 당목항에서 두 섬을 오가는 배의 운항빈도다. 당목항에서 생일도까지는 하루 6편의 여객선이 운항하는데, 금일도까지는 하루 27편의 여객선이 간다. 이쯤이면 금일도 사람들이 ‘가난한 이웃’인 생일도를 보는 시선과 태도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왜 생일도 기사만 쓰느냐”는 항의도 그래서였을까.

# 금일도에 여행자가 없는 이유
금일도에 들어가 보면 거기가 섬이라는 게 잘 믿기지 않는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육지에 있는 웬만한 것들이 다 있어서다. 웬만큼 큰 섬에도 중학교까지가 고작인데, 금일도에는 고등학교가 있다. 읍내에는 주유소도, 관공서도, 프랜차이즈 음식점도 있다. 호떡집도 있고, 꽈배기도 판다. 주민들을 위한 문화시설이나 사회기반시설도 잘 돼 있는 편이다.
그런데 여행자를 위한 편의는 태부족이다. 관광안내소는 아예 없고, 장사가 잘 안 되는 펜션 몇 곳 외에 여행자를 위한 숙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무작정 섬에 들어왔다가는 잘 곳을 못 찾는 낭패를 겪을 수도 있다. 여행자를 위한 시설이 없는 건 평소에 섬을 찾는 관광객이 많지 않아서다. 인과관계가 꼬리를 문다. 여행자가 많지 않은 건, 섬에 명소가 없어서가 아니라 섬 주민들이 여행자들을 불러들일 이유가 별로 없어서다. 여행자를 불러들일 이유가 없는 건 섬 주민들이 ‘먹고살 만해서’다.
금일도는 전국 최고의 다시마 산지다. 전국 다시마 생산량의 70%가 완도산인데, 완도산의 80% 정도가 이 섬에서 난다. 금일도 주위의 바다는 온통 다시마와 미역, 김 양식장이고, 섬 안의 빈 땅은 죄다 다시마 건조장이다. 금일도에는 밭이 거의 없다. 밭에다 작물을 심어 거두는 것보다 그물을 널어놓고 한철 다시마를 말려서 거둬들이는 수익이 훨씬 더 많아서다.
양식업이 성하니 섬 경기가 썩 괜찮은 편이다. 섬 안에는 일하는 젊은이들도 많고, 그런 젊은이의 열 배는 족히 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있다. 생업만으로 먹고살 만하니 굳이 관광객을 불러들이기 위해 애쓸 것까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광객은 줄었고, 금일도의 명소도 바깥에 알려지지 않았다.
# 숨고 싶을 때 가면 딱 좋은 섬
금일도의 명소는 잘 관리되지 않은 탓에 ‘가보라’고 소매를 끌 정도는 아니다. 적극적으로 권할 수도, 그렇다고 ‘별 볼 게 없다’고 치부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여행지란 얘기다. 그래서 섬에는 여행자들이 거의 없다. 여행자만으로 인구밀도를 계산한다면, 금일도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한적한 섬이리라. 이만한 크기의 섬에 이렇게 여행자가 적은 곳이 또 있을까.
그래서 결론부터 말하면 금일도는 ‘숨고 싶을 때’ 가면 딱 좋은 곳이다. 여행자가 드물어서 그 섬에서는 아무도 여행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누군가 금일도로 홀연히 떠난다면, 자연스럽게 섬에 스며서 찾아낼 수 없을 듯하다. 금일도 여행을 잘하려면 지켜야 할 조건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 큰 기대 없이 갈 것. 둘째, 외로움이 느껴질 정도의 호젓함을 충분히 누릴 것. 셋째, 섬사람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볼 것.
금일도의 대표 명소를 딱 한 곳만 꼽으라면 단연 ‘용굴’이다. 용굴은 바다에 살던 용이 승천할 때 생겼다는 전설이 깃든 해안동굴. 이른바 ‘코끼리 바위’처럼 해식작용으로 생긴 해안가 동굴인데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바위가 만들어낸 경관이 기이하다. 이런 특별한 경관에 걸맞지 않게 가는 길도 희미하고, 안내판은 부실하며 주변은 어수선하다. 대표 명소인 게 분명하지만, 그곳에 가면 ‘아무도 없다’.
금일도에서 가장 근사한 바다는 금일해당화해변이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백사장이 펼쳐진 바다인데, 파스텔톤의 바다색과 어우러진 해안 풍경이 근사한 곳이다. 명사십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월송리해송림도 있다. 200년 전쯤 주민들이 방풍림으로 심어놓은 해송이다. 2500여 그루의 소나무가 1.2㎞의 해안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숲을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다. 이만한 정취면 근사한 카페 한두 곳쯤은 있을 법한데, 그냥 바다와 솔숲만 있을 뿐이고 인적도 드물다.
금일도 동쪽 용항리의 갯돌해변은 무섬증이 느껴질 만큼 한적하다. 이곳 해변의 갯돌은 옥수수알 크기 정도로 작다. 이 갯돌이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며 내는 ‘차르르’ 소리가 더없이 낭만적이다. 다만 해안가로 밀려드는 스티로폼이나 폐어구가 거슬린다. 좀 치우고 잘 정비하면 근사한 여행지가 될 법한데 아쉽다.
금일도의 최고봉인 망산(234.5m)은 섬의 전망대라 할 수 있다. 신평리마을회관 쪽에서 산책하듯 쉽게 오를 수 있다. 산 정상은 초지 형태의 구릉인데 여기서 금일도가 한눈에 다 보인다. 명사십리 해변과 월송리해송림은 물론이고 신도, 충도, 금당도 등 점점이 떠 있는 섬을 감상할 수 있다.

# 작은 섬이지만, ‘작은 섬’은 아닌 섬
지금부터는 좀 유심히 봐야 할, 섬사람의 사는 얘기다. 금일도 남쪽에 본 섬에 딸린 새끼 섬이 있다. 섬 속의 섬 소랑도다. ‘작을 소(小)’에 ‘물결 랑(浪)’ 자를 쓴다. 지명에 전해지는 두 가지 얘기가 있다. 바다가 잔잔하고 폭풍우에도 큰 물결이 일지 않아 그런 이름이라고도 하고, 섬의 모양이 소라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는 얘기도 있다. 소라의 방언이 ‘소랑’이다.
소랑도 면적은 1㎢. 서울 여의도 크기의 3분의 1쯤 된다. 그냥 ‘섬’이라기엔 작고, ‘작은 섬’이라고 하기엔 또 크다. 소랑도를 작은 섬이라 할 수 없는 결정적 이유가 있다. 평일도와 소랑도 사이에 진짜로 이름이 ‘작은섬’인 섬이 있어서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포클레인 삽질 한 번으로 떠낼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섬이다. 소랑도는 작아도 그 앞의 진짜 ‘작은섬’보다는 크니까, 작은 섬은 아니란 얘기.
소랑도에서 가장 유명한 건 막걸리다. 평일도까지 가는 것도 쉽잖은 걸음인데, 거기서 또 소랑도까지 누군가 들어갔다면, 필시 막걸리 때문이다. 남도의 섬에서 빚는 이름난 막걸리가 더러 있다. 대표적인 게 여수 개도의 개도막걸리와 낭도의 낭도막걸리다.
손바닥만 한 섬의 막걸리가 어떻게 유명해졌을까. 섬의 자연조건이 양조 발효의 적지라 맛이 좋다는 견해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판로 부족으로 섬에서 자가소비용처럼 소량만 만드니 그런 희소성이 술맛을 더 좋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소랑도막걸리는 완도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술이다. 섬 전체를 통틀어 할머니 딱 한 명만 소랑도막걸리를 빚어 팔고 있으니 비싸지는 않지만 귀하디귀한 술이다. 이쯤이면 소랑도막걸리 맛이 궁금해질 텐데, 일단 그 얘긴 잠시 미뤄두고, 소랑도에서 본 것 얘기부터 해보자.

# 고향에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
소랑도는 본섬인 평일도와 연도교(連島橋·섬과 섬을 잇는 다리)인 소랑대교로 연결돼 있다. 2006년 완공한 소랑대교의 길이는 200m 남짓이다. 겨우 육교 수준을 면한 정도의 왕복 2차선 다리를 ‘대교(大橋)’라고 부르는 게 처음에는 ‘좀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는데, 짧은 생각이었다. 다리를 꿈꾸던 섬사람들의 오랜 숙원과 공사에 들인 노고를 생각한다면 섬에 놓인 다리는 아무리 작아도 ‘큰 다리’다.
평일도에서 연도교를 건너 소랑도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길옆에 세운 두 개의 비석이다. 각각 돌거북 받침돌에다 오석(烏石)을 다듬어 탑신으로 올렸다. 먼저 보이는 비석은 ‘청해(靑海) 유인국(兪仁國) 선생 송덕비’다. 유인국. 1945년생. 소랑도 출신으로 일찌감치 서울로 유학해 사업가로 성공했다. 그는 특히 연도교를 놓는 데 물심양면으로 기여한 모양인데, 그 공로를 기리기 위해 2012년에 이 송덕비를 세웠다.
송덕비에는 소랑대교를 놓기까지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 소랑도 학생들이 본섬까지 나룻배로 통학하던 시절이던 1952년 6월, 통학 배가 침몰해 어린 학생들 여럿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 사건 얘기도 있다. 소랑도 주민에게 연도교는 숙원 중의 숙원이었다.
송덕비에 새겨진 공적은 당대에 그치지 않는다. 부친이 섬에 분교를 유치하고, 방파제를 쌓고 성황당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는 이야기도 적었다. 고향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서 ‘송덕불망(頌德不忘)’으로 비를 세웠으니, 당사자는 얼마나 뿌듯했을까. 이미 다 만들어진 비석에다 그 이후에 쌓은 경력이나 이력까지 추가로 촘촘하게 새겨넣은 데서 그런 마음이 보인다. ‘평창올림픽 성화 봉송주자’ ‘서울 강서구 기부자 명예의 전당 등재’ 등은 비석을 세운 지 10년쯤 지나서 추가로 새긴 것. 그러고 보니 경력사항 중에는 ‘학창시절 유도부장(공인2단)’도 있고, ‘서울 한양골프클럽 챔피언’ 경력도 있다. 사소하고 촘촘한 자랑을 읽다가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향이 아니라면, 어디 가서 이런 자랑을 할 것인가.

# 열여덟에 섬마을에 시집 온 며느리
송덕비를 지나면 또 하나의 비석이 있다. ‘열녀(烈女) 서공금(徐共今) 효행비’다. 서공금이 누굴까. 비문을 살핀다. 1893년생 금일읍 출신. 열여덟에 소랑도로 시집와서 서른 나이에 혼자 된 뒤에 시댁의 팔촌 대가족을 뒷바라지하며 갖은 고초 속에서 6남매를 키웠다. 서울올림픽 개막을 닷새 앞둔 1988년 9월 12일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게 벌써 38년 전의 일이니 슬하의 6남매도 이제는 모두 어머니 곁으로 가고 없다.
외딴 섬의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 풀뿌리와 해초죽으로 연명하며 대가족을 건사했던 며느리의 삶이 어땠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지만, ‘모두 그랬다’고 해서 고통이 과소평가될 수 없다.
후손들은 할머니의 절제된 삶의 태도를 잊지 않았다. 비석에 구체적인 얘기가 있다. “겨울엔 시어른들의 수저와 젓가락을 행주에 싸서 밥 짓는 솥뚜껑 위에 올려 따스하게 데운 후 진짓상을 올렸으며, 혹시 ‘한동재’가 들지 모르니 밥 한 그릇을 조금씩 덜 먹고 늘 남겨두었다.” 한동재란 식사 때를 넘겨 방문하는 사돈 식구나 친구를 말한다. 자신의 배고픔보다 오지 않은 손님의 끼니에 더 마음을 썼다는 얘기다.
‘이 무슨 시대착오적 얘기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때 며느리에게 요구된 게 그랬다. 비석은 2008년 8월에 증손주가 세운 것이다. 비석은 증조할머니의 삶을 기리며 서 있지만, 효행비의 진짜 주인은 선대가 겪은 고난의 생애를 기억하고 그걸 돌에 새겨 기념하고 기리고자 했던 증손주이지 않을까.
# 딱 한 집에서만 빚는 소랑도막걸리
이제 미뤄놓은 막걸리 얘길 해보자. 소랑도에는 가게 겸 식당이 하나 있다. 아니 사실, ‘있다’고 말하기가 좀 민망하다. 진열대에 팔 물건 하나 없는 가게는 폐허에 가깝고, 뒷마당에 몇 개 테이블이 전부인 식당은 문을 연 것도, 닫은 것도 아니다. 간판도 없다. 그냥 작은 포스터 크기의 ‘소랑 막걸리집’이란 벽보 하나만 붙어있을 따름이다. 이곳에서 이넙단(78) 할머니가 소랑도막걸리를 빚는다.
저녁 무렵에 닫힌 문을 두드리니 이 할머니가 나왔다. 소랑도막걸리는 아무 때나 살 수 있는 건 아니라던데 “마침 담가놓은 막걸리가 있다”고 했다. 막걸리를 담아온 할머니가 쟁반에 열무김치까지 내왔다. 막걸리는 걸쭉한 질감이었는데, 뜻밖에 맛은 탁하지 않고 가벼운 편. 누룩 향이 은은했다. 시중의 막걸리와는 좀 다른 느낌이라 낯설었지만 한두 잔 마셔보니 독특한 매력이 있다.
소랑도막걸리는 언제부터 담기 시작했던 것일까. 그 질문에 다리 건너 마을 사동(沙洞)에서 스무 살 되던 해 동짓달에 소랑도로 시집왔다는, 이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왔다. 시집와서 밭농사도 하고, 전복도 잡고, 미역과 다시마도 따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억척스럽게 살았던 이야기가 ‘한숨 반, 눈물 반’이다.
이 할머니가 막걸리를 빚게 된 사연을 간추려 보면 이렇다. 시집와서 마을 뒤 산자락의 허름한 초가집에서 살다가 어찌어찌 기반을 마련해 동네로 내려와 가게 딸린 집을 사서 자그마한 점방을 차려 운영했단다. 그 무렵 소랑도의 한 할머니가 막걸리를 빚어 팔았는데, 그게 제법 인기가 있었다고 했다. ‘까짓것, 술 빚는 건 나도 하겠다’ 싶어서 술을 담가 팔기 시작한 게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오래전에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혼자 남아 술을 빚고 있다는 얘기다.

# 이제는 시한부의 술, 소랑도막걸리
자칫 소랑도막걸리가 사라질 뻔한 일이 있었다. 이 할머니의 얘기. “남편이 이문에 밝고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하는 성미였어. 남편이 어느 날 남의 돈으로 소 7마리를 덜컥 사서 들여왔네. 그게 그렇게 야속했지. 갯일에, 밭일에, 가게 일에 뼈가 녹는데 소까지 키워야 했으니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어.”
얘기 끝에 할머니 눈에 눈물이 슬쩍 비쳤다. 2006년 소랑대교 준공 직전, 할아버지는 급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세상, 살았다 할 게 없다니까. 허망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이 할머니는 그날로 술빚기를 접었다. “영감이 죽으니 재미 진(재미있는) 일이 없어졌어.”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까. 이장을 앞세우고 마을 주민들이 찾아왔다. 다시 장사를 해달라는 간청이었다. 다들 말은 ‘그래도 기운을 차리려면,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지만, 못 마시게 된 막걸리 생각도 있어 보였다. 고심 끝에 이 할머니는 주민들에게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 하나는 ‘절대로 외상은 없다’는 것. 두 번째는 ‘늦어도 오후 9시 30분에는 문을 닫겠다’는 것. 그전까지는 못 받은 외상 술값이 한 달 매상보다 더 많았을 때도 있었고, 자정을 넘겨도 끝나지 않는 술자리가 예사였다. 주민들이 흔쾌히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막걸리 집은 다시 문을 열었다.
근근이 이어지고 있긴 하지만, 소랑도막걸리 집은 이제 시한부다. 이 할머니의 자녀들도 다 섬을 나갔고, 돈 될 리 없는 작은 섬에서의 술빚기도 이어질 리 만무하니 명맥이 끊길 건 명백하다. 막걸리가 없으면 금일도에 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사라지게 된다. 그때의 금일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적막하리라.

■ 스님의 숙소
금일도에는 사찰과 선원, 펜션과 카페를 겸하는 공간이 있다. 겸하는 일이 많은 만큼 이름도 길다. ‘금일둘레길 펜션·게스트하우스 & 치유문화카페’(010-9251-8433)다. 약선사찰발효식품 명인인 법인 스님이 직접 잠자리를 봐주고 음식을 차려낸다. 주방이 딸린 독립건물 펜션의 객실은 딱 하나. 4명이 묵을 수 있다. 숙박비는 15만 원. 카페 한쪽에 침구를 놓아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는 조식 포함, 5만 원이다. 특별한 건 음식이다. 법인 스님이 오랜 시간 발효로 만든 장류를 기본양념으로 전복 등 다양한 해산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을 정성스럽게 낸다.
박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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