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동네 공방인 줄 알았는데…알츠하이머 이야기 나누는 곳 ‘페이지스’
보호자·경도인지장애·중년층 위한 골목 커뮤니티 공간
“두려움 대신 준비”…일상 속 인지 활동으로 이어지는 치매 대응

서울 강동구 상일동 골목 안쪽, 간판만 보면 작은 공방처럼 보이는 공간이 있다. '페이지스(Page's)'는 뜨개질과 자수를 배우는 곳이면서, 동시에 인지 관련 도서가 놓인 서재이고, 치매를 경험했거나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뜨개질, 사시코 자수, 프랑스 자수, 컬러링 같은 손 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하지만 목적은 취미 활동에만 있지 않다. 반복적인 손 움직임과 색 선택, 패턴 인식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인지 자극을 유도하는 구조다. 대화를 통해 기억을 끌어내는 과정이 함께 이루어진다. 특히 개인 사진을 기반으로 만드는 컬러링 프로그램은 회상요법을 일상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Q. 페이지스를 열게 된 계기부터 듣고 싶습니다.
원래는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습니다. 전시 기획을 하고 관람객과 작품을 연결하는 일을 했는데, 아이 양육과 어머니 돌봄을 거치면서 한동안 일을 쉬게 됐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치매로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치매가 시작되는 시기를 놓쳤습니다.
어르신들이 늘 '늙으면 다 그렇다'고 말씀하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하시는데, 저는 대답하다가 점점 짜증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치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2016년쯤 '이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이미 병이 시작된 지 3년이 지나 중등도 알츠하이머병으로 진행된 상태였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70대 중반이었고, MMSE 점수도 매우 낮게 나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3년이 가장 아쉽습니다. 미술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림이나 만들기 같은 인지 자극 활동을 해드릴 수 있었는데, 그런 도움을 전혀 못 드렸다는 점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치매를 겪고 난 뒤가 아니라, 그 이전 단계에서부터 준비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페이지스는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Q. 집안 어른이 치매 증상을 보여도 가족이 인지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집에서도 다 괜찮다고 하셨고, 저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엄마가 치매이길 바라는 것처럼 보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행을 가면 공간을 못 알아보는 일이 두어 번 있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셔서 '내가 여기 누구랑 왔지?'라고 하시는 식이었습니다. 그때는 드문 일이라고 생각해 그냥 지나갔는데, 지금 돌아보면 분명한 초기 신호였습니다.
어머니는 인지 예비능이 높은 분이어서 일상 대화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가족사진을 보면서 '쟤 누구지?'라고 물어보시다가도, 이름을 알려드리려 하면 '넌 날 바보로 아냐'라고 하시며 차단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아시는구나' 하고 넘어갔고, 그게 경증일 때 진단 시기를 늦춘 요인이 됐습니다.
Q. 병원 진단 이후 돌봄 과정은 어떻게 이어졌나요?
처음에는 집에서 돌봐드려야 했습니다. 요양보호사 방문도 거부하시고, 주간보호센터도 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편안해하시는 분을 모셔 말벗을 해드리는 방식으로 시작했습니다. 점점 증상이 진행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망상 증세로 아버지를 못 알아보시고 낯선 남자로 인식해 도망치려 하시고, 밤에 불안해하시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결국 집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고, 병원 입원 후 요양원으로 모셨습니다.

Q. 어머니의 치매 진행 과정과 그 경험이 대표님께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2016년 말부터는 가족들을 알아보시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때부터 증세가 빠르게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의 시간은 가족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결국 2017년 11월 말 요양원에 입소하셨습니다. 그 시기는 가족들을 몰라보시고 배회와 이상 증세가 심해져 가족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였고요.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어머니의 건강 상태였습니다. 50대 중반에 식도 수술을 받으신 이후 식사에 대한 두려움을 계속 가지고 계셨고, 70세 전후로 그 증상이 더 심해지면서 식사를 거의 못하시고 주무시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체중이 32kg까지 줄어들었을 정도였어요.
그 영향으로 치매가 진행되는 중요한 시기에 시도해 볼 수 있는 것들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면 '자존심 상해서 못 하겠다', '내가 이런 걸 왜 해야 하느냐'며 거부하시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느낀 건, 앞으로 고학력 노령 인구가 많아지는 시대에는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조금 더 지적이고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겠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도 그 부분에서 작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Q. 상일동 골목 입지는 의도하신 선택이었나요?
현실적인 이유가 컸지만, 결과적으로는 동네 안쪽 골목이라는 점이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하는 페이지스의 성격과 잘 맞았습니다. 페이지스에 둔 가장 상징적인 물건은 어머니가 옆에 두고 쓰셨던 스탠드 전등(table lamp)입니다. 늘 곁에서 사용하신 작은 스탠드를 이 공간에 가져왔습니다. 평범한 물건이지만 저에게는 어머니와 함께했던 시간과 돌봄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이 공간도 어머니의 스탠드처럼 누군가에게 조용히 옆에 있어 주는 존재가 되었으면 합니다. 처음 오시는 분들이 뭔가를 배우러 왔다기보다, 잠깐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감정'을 먼저 얻으셨으면 하고요. 어머니 옆에 있던 스탠드처럼 치매로 힘든 누군가에게 따뜻한 빛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Q. 페이지스는 공유 서재, 프로그램, 소모임 기능이 함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함께 둔 이유와 서재를 인지 관련 서적과 미술 서적 중심으로 구성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세 가지를 하나로 연결하고 싶었습니다. 정보만 있는 공간, 활동만 하는 공간, 모임만 있는 공간은 각각 존재하지만, 실제로 치매나 인지 저하를 겪는 과정에서는 이 세 가지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책을 통해 정보를 접하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이야기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손을 움직이는 활동으로 이어지면서 생각이 정리되는 흐름이 만들어지기를 바랐습니다.



Q. 치매안심센터 등 공적 기관과 페이지스의 차별점은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건 '관계 속에서 머무르는 경험'입니다. 공적 기관은 검사와 상담 등 필요한 역할을 하지만, 대부분 목적 중심으로 운영됩니다. 반면 페이지스는 특별한 목적 없이도 들러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을 지향합니다.
누군가와 같이 앉아서 손을 움직이고 서로의 상황을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히 보호자들은 혼자 감당하는 시간이 길어서, 이곳에서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Q. 대표님 자신도 치매 위험군 판정을 받으셨다고요.
저도 치매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거라 의심되어 알츠하이머병 위험도 검사를 받았더니 고위험 경계로 나왔습니다. 굉장히 불안했죠. 병원에서 뇌 기능 개선제를 권유해서 복용했지만, 위장 문제 등 부작용을 겪으며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 검사 결과를 지나치게 맹신하며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생활 습관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인지 자극 활동을 하고, 취미를 만들고, 스트레스를 줄이면서 인지 예비능을 키우는 방향으로요. 그 과정에 디멘시아뉴스의 기사가 큰 도움이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약부터 접근하려고 하지만, 저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활동'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Q. 현재 프로그램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요?
뜨개질, 자수, 컬러링 등 손 활동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공방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저는 결과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뜨개질할 때도 단순히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색을 고르고 패턴을 이해하고 양손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과정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프로그램도 강의처럼 가르치는 방식보다는, 각자의 속도로 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도록 운영하고 있습니다. 페이지스에서는 활동, 대화, 관계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Q. 자수 활동은 인지 자극과 정서 안정에 어떤 방식으로 도움이 되나요?
저도 간병을 하면서 가장 크게 도움을 받았던 게 자수였습니다. 특히 프랑스 자수와 일본 자수(사시코)를 많이 했습니다. 프랑스 자수는 색을 고르고 형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중심이라서, 작업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됩니다. 사시코 자수는 일정한 패턴을 반복해서 바느질하는 방식이라, 같은 동작을 계속 이어가면서 리듬이 생깁니다. 그 반복되는 리듬 자체가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Q. 컬러링 프로그램이 특징적입니다.
기관에서는 보통 동일한 도안을 사용합니다. 저는 그 방식이 아쉬웠습니다. 페이지스에서는 각자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기반으로 컬러링 도안을 만듭니다. 가족 여행 사진이나 본인 사진을 가져오시면,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색칠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해 드립니다. 이 방식에는 회상요법이 활용됩니다. 단순히 색을 채우는 작업이 아니라, '이게 누구지', '이때 어디 갔지', '이날 무슨 일이 있었지' 같은 대화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컬러링 활동을 통해서 스스로 기억을 떠올리는 구조입니다.
특히 보호자와 함께하는 경우 이미지 속 그날의 대화가 이어지면서 서로의 기억을 확인하고 공감하는 시간이 되기 때문에, 회상요법의 장점이 일상 안에서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것이죠.
Q. 오픈 후 방문객들의 반응과 앞으로의 주요 대상은 누구인가요?
3월 26일에 오픈해서 지금은 겉모습을 보고 공방으로 알고 들어오셨다가 공간의 취지를 이해하시는 탐색 단계입니다. 앞으로는 알츠하이머 관련 공간이라는 점을 더 분명히 드러낼 생각입니다.
주요 대상은 보호자, 경도인지장애 단계, 그리고 중년층입니다. 보호자들에게는 마음의 휴식을, 인지 저하 불안을 느끼는 분들에게는 '지금부터 뭔가 해보고 싶다'는 동기를 채워드리고 싶습니다. 비용은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2시간 기준 1인당 1만 5천 원(재료비 별도)으로 문턱을 낮추어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사람들이 이 공간의 의미를 이해하면, '인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경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Q. 페이지스의 확장 가능성과 치매 인식에 대해 바꾸고 싶은 점은 무엇인가요?
최근 복지관이나 지역 공방들과 연결되는 사례를 보며 이 활동이 공간 밖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앞으로는 치매안심센터와 연계해 진단 이후 지역사회에서 일상 활동을 지원하고 싶고, 제도권 안에서 활동하기 위해 평생교육사 자격증도 준비할 계획입니다.

Q. 끝으로 디멘시아뉴스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치매 돌봄을 겪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정보가 너무 어렵거나 멀게 느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전문가 중심의 이야기도 물론 중요하지만, 실제로 치매 가족이 일상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디멘시아뉴스처럼 현장의 이야기와 경험을 같이 다뤄주는 매체가 소중하게 다가왔습니다.
치매를 두렵기만 한 질병이 아닌, 사람들이 자기 삶 안으로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끌어주는 역할을 계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독자로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요. 디멘시아뉴스와 매거진, 북스의 출간 책들을 통해 실용적인 정보가 더 많은 분께 널리 전달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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