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 김옥균을 암살한 제주목사 홍종우를 위한 변명

나는 젊은 시절부터 실패한 개혁가와 현실 문제로 방황하는 지식인들에게 오래 마음이 갔다. 역사는 늘 승자의 이름으로 간명하게 정리되지만, 실제의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성공한 개혁은 찬란한 이름으로 남고, 실패한 개혁은 오해와 침묵 속에 묻힌다. 그래서 나는 늘 기록의 가장자리에서 오래 서성이게 된다.
홍종우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우리는 그를 너무 오래 '김옥균을 쏜 사람'이라는 한 문장 속에 가두어 두었다. 그러나 한 인간의 생애를 한 발의 총성으로만 환원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으로서 서양 문명과 제도를 직접 체험했던 사람, 프랑스 체류 기간 한복만을 입고 다닌 사람, 『춘향전』과 『심청전』을 불어로 옮기며 조선을 유럽에 설명하려 했던 사람, 외세 의존적 개화가 아니라 군주권을 중심으로 한 자강 개혁을 구상했던 사람, 그리고 마침내 제주에서 제도의 언어로 현실 개혁을 시도했던 사람이 바로 홍종우였다. 홍종우는 갑신정변의 우두머리 김옥균을 죽인 사람이라는 기억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 인물이었고, 특히 제주목사 시기는 그를 다시 읽게 만드는 결정적 대목이다.
홍종우는 1850년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났다. 몰락한 가문과 궁핍한 성장 환경은 그에게 일찍부터 시대의 벽을 체감하게 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을 거쳐 1890년 프랑스로 건너가 1893년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단순히 유학생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기메 박물관에서 일하며 한국의 고전을 정리하고 번역했으며, 서양의 제도와 문명을 직접 관찰했다. 하지만 그가 서양에서 본 것은 문명의 빛만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제국주의의 질서가 있었다. 바로 이 경험이 그로 하여금 개혁의 필요와 외세 의존의 위험을 동시에 보게 만들었다. 그는 나라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변화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조선 자체의 힘으로 하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 지점에서 김옥균과 홍종우의 길은 갈라진다. 김옥균이 일본의 힘을 빌려 급진적 개혁의 속도를 확보하려 했다면, 홍종우는 그런 방식이 결국 주권을 잠식한다고 판단했다. 그가 군주권 강화에 집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약한 왕권 아래에서는 어떤 개혁도 외세의 바람 앞에서 뿌리내릴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어쩌면 그는 러시아와 프랑스에서 볼 수 있었던 강한 힘을 가진 절대군주를 하나의 모델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강한 군주권 아래에서 국가를 통합하고 근대화를 추진했던 체제를 조선의 현실 속에서 변형하려 했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단순한 수구 인물이 아니라 '국가 주도 개혁'을 꿈꾼 사람이었다. 특히 군주권이 바로 서지 않으면 어떤 개혁도 공허하다고 보았다. 서세동점의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의 왕권은 지나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외세의 힘을 빌려 균형을 잡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국가의 중심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진단했다.
우리는 이미 상하이의 총성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더 주목하는 것은 그 이후이다. 홍종우의 변모는 바로 이 지점을 보여준다. 그는 더 이상 총을 들지 않았다. 홍종우는 대한제국의 관료(중추원 의관 등)가 되어 법규를 정비하고 국가 질서를 재구성하는 실무에 참여했다. 그가 주도한 <법규류편속일>과 같은 법규정리는 단순한 편찬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질서를 문장으로 고정시키고 통치의 기준을 일상 속에 배치하는 일이었다.홍종우는 대한제국의 관료로서 여러 개혁을 주장했다. 외세의 이권침탈을 반대하고, 국가 재정을 강화하며, 상업을 보호하려 했다. 그는 단순한 수구적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나름의 방식으로 국가를 지키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제도를 정비하고 질서를 세우려 했다. 그리고 그 질서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의 삶에 작용할 것인가를 늘 고민했다.
그는 1903년 제주목사로 내려온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중앙에서 밀려난 좌천으로 해석하지만, 나는 그 시기를 오히려 그의 정치사상이 가장 구체적인 행정 실천으로 전환된 시기로 본다. 이에는 아마 프랑스에서 경험한 행정학의 원조 격인 관방학의 영향도 크게 받았을 것이다. 제주에서 그는 젊은 날의 문제의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혁명의 언어에서 행정의 언어로 바뀌었을 뿐이다. 홍종우는 제주목사에 그치지 않고 지계(땅의 경계)감독직을 겸임하며 토지 측량과 지계 정리라는 중대한 과제를 맡았다. 이것은 단순한 부수 직무가 아니라 근대적 토지 질서의 기반을 정비하는 작업이었다. 토지는 국가 재정과 행정의 근본이었고, 토지의 경계와 소유 관계가 불분명한 사회에서는 공정한 조세도, 안정된 행정도, 백성의 생업 보호도 불가능했다. 홍종우가 제주에서 토지제도 정비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실무형 개혁가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구호를 외친 것이 아니라 토지의 선을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했다.
제주의 토지와 부역 문제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의 개혁 의도가 더욱 선명해진다. 토지 측량과 지계 정리는 단순한 행정 통계가 아니었다. 누가 어느 땅을 경작하고, 어떤 기준으로 세금이 부과되며, 국가의 수취가 어디까지 정당한가를 다시 묻는 작업이었다. 토지 질서가 흐리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힘없는 백성이다. 경계가 불분명한 땅은 권세 있는 자의 손으로 넘어가기 쉽고, 불명확한 장부는 곧 과세의 자의성으로 이어진다. 홍종우가 제주에서 토지 질서를 바로잡으려 한 것은 결국 세금의 자의성과 수탈의 틈을 줄이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지계감독을 겸임했다는 사실은 조정이 제주를 단순한 외곽 행정 단위가 아니라, 제도적 재정비가 필요한 공간으로 보았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홍종우는 그 기대를 적어도 방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공직기간만 그럭저럭 때우다 가는 유배지의 관리처럼 세월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제주를 하나의 행정 현장으로 받아들였고, 그 속에서 국가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미세한 작업을 시도했다.
제주에서 그의 개혁이 더 의미심장한 이유는 그것이 생활의 현장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홍종우는 『삼군구폐절목』과 『삼군도우구폐절목』을 반포하여 관속의 사적 재물 요구를 억제하고, 송사를 기한 내에 처리하게 하며, 공물과 부역의 자의적 남용을 금지하는 조항들을 제시했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기의 지방 행정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앙의 거대한 이념보다 오히려 말단 권력의 문란이었다. 아전의 농간, 관속의 사적 착복, 백성에게 자의적으로 떠넘겨지는 공물과 부역, 질질 끌리는 송사, 억울함을 호소할 통로의 부재가 백성의 삶을 짓눌렀다. 홍종우는 바로 그 지점을 겨냥했다. 그는 제주의 개혁을 대의명분의 차원에서만 말하지 않고, 구체적 규정과 행정 절차의 차원에서 접근했다. 다시 말해 그는 '좋은 정치'를 추상적으로 말하기보다 '나쁜 행정'을 실제로 줄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는 대단히 근대적인 감각이다. 국가의 힘은 거대한 담론으로만 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억울함을 덜 느끼는 제도와 절차 속에서 체감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삼군구폐절목』과 『삼군도우구폐절목』의 의미는 단순한 금지 조항의 나열을 넘어선다. 절목은 지방 권력이 마음대로 흔들던 관행의 세계를 문서의 세계로 옮기는 일이었다. 이는 프랑스 유학 시절 터득한 행정법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이 아니라 규정이 지배하도록 만드는 시도였다. 이는 조선 후기 지방 사회의 오랜 병폐를 생각할 때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다. 관속이 사적으로 물품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고, 송사를 기한 내 처리하게 하며, 공물과 부역의 범위를 함부로 넓히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행정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다. 백성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법 자체보다 법이 없는 듯 자의적으로 행사되는 권력이다. 홍종우는 그 불안을 줄이려 했다. 이는 곧 지방 행정의 '사사로움'을 줄이고 '공적 질서'를 세우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황실 중심 개혁을 신뢰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제주에서의 이러한 조치는 군주권 강화가 백성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그 나름의 답이기도 했다. 강한 국가는 단지 군대가 센 나라가 아니라, 말단 행정이 함부로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는 나라여야 한다는 인식이 그 속에 배어 있었던 셈이다.그 당시 홍종우의 개혁작업에 대해서 제주에서는 찬반 양론이 첨예했던 것 같다. 특히 토호세력 등 기득권의 반발이 매우 심했던 것 같다. 흥미로운 점은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둘로 갈린다는 것이다.
가혹한 수령이라 고소한 이도 있었고 곡식 만냥을 풀어 백성을 도왔다고 기록한 이도 있었다. 1904년 황성신문에서는 두 건의 상반된 기사가 실렸다. 하나는 기득권 침탈에 불만을 품은 토호세력의 상소로서 '제민 소원'으로 불리는 고소기사다. 제주인 김창휴가 평리원에 상소하여 홍종우가 전 군수의 집안을 가혹하게 다루었다고 탄핵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후 10개월 뒤 또 다른 집단이 '제민 청질'이라는 반대상소를 올린다 이들은 아전 등의 부정을 엄히 다스리고 도둑을 징벌하며, 토지의 외지 매각을 막고 곡물 1만냥을 풀어 백성을 도왔다며 홍종우의 혜정을 상세히 주장했다.
제주사에서 지워진 이름, 홍종우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나는 이 대목에서 홍종우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다. 그는 혁명적 인물이었으나, 제주에서는 혁명의 언어를 버리고 제도의 언어를 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상을 현실에 맞게 번역한 것이었다.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나라, 군주권을 중심으로 한 자강, 부패한 지방 행정의 정비, 백성의 부담 경감, 토지 질서의 정리. 이것은 모두 젊은 날 그가 품었던 문제의식의 다른 얼굴이었다. 그는 제주에서 체제 전복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체제 내부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자 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제주 행정은 더욱 중요하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한 번에 만들 수 없는 시대라면, 적어도 낡은 질서 속에서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막아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홍종우는 그 어려운 일을 제주에서 해보려 했다. 이재수의 난 이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제주 전역을 순찰하며 현장을 직접 확인한 기록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용연과 방선문 등에 마애각으로 남은 흔적은 단순한 유람이 아니라 현장 행정의 자취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관아에 앉아 문서만 본 관리가 아니라, 섬의 현실을 발로 확인하려 했던 목민관이었다.
물론 홍종우를 미화할 수는 없다. 그의 생애에는 분명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그러나 그 어둠이 그의 전 생애를 삼켜버리게 두는 것도 역사적 균형을 잃는 일이다. 더욱이 대한제국 말이라는 시대를 생각하면, 제주에서의 그의 개혁 시도는 단순한 지방 행정이 아니라 국가 재건의 말단 실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큰 이론을 말하기보다 세부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 거대한 선언보다 이러한 세부의 개혁에서 더 진실하게 움직인다. 이 점에서 홍종우는 실패한 혁명가이면서 동시에 실패를 끝까지 행정으로 견딘 지식인이었다. 꿈이 좌절된 뒤 냉소로 물러난 사람이 아니라, 남은 자리에서 가능한 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이려 했던 사람이었다는 점이야말로 우리가 그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더 오래 품지 않았다. 일본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황실 중심 개혁 노선은 설 자리를 잃었고, 홍종우 역시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점차 기록 밖으로 밀려났다. 그는 1905년 이후 공식 기록에서 흐릿해지고, 무안에 머물렀다는 설, 다시 프랑스로 향했다는 설, 병을 얻어 떠돌았다는 이야기가 교차한다. 확실한 것은 1913년 1월 2일 그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뿐이다. 이 마지막은 참으로 애잔하다. 파리에서 조선의 미래를 구상했던 사람, 상하이에서 역사의 총성을 남긴 사람, 제주에서 제도의 언어로 현실을 고치려 했던 사람의 최후가 그렇게 고요했다는 것은 한 인간의 생애를 넘어 대한제국이 놓쳐버린 또 하나의 가능성의 소멸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글의 끝에서 그를 향해 짧은 애도의 말을 남기고 싶다.
홍종우여, 그대는 정답을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끝내 질문을 놓지 않은 사람이었다. 외세에 기대지 않고 나라를 세울 수 있는가,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개혁은 가능한가, 제도는 어떻게 백성의 삶을 살리거나 짓누르는가. 그대는 총으로도, 법으로도, 행정으로도 그 물음에 답하려 했으나 시대는 그대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대가 꿈을 끝까지 키우지 못한 것은 그대 한 사람의 한계만이 아니었다. 나라 자체가 무너져가던 시대의 비극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대를 한 줄의 악명으로만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실패한 혁명가요 방황하는 지식인이며, 끝내 제도로 세상을 고쳐보려 했던 외로운 행정가로 기억해야 한다. 그대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그 꿈을 향한 고투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제주의 바람 속에서, 파리의 거리에서, 상하이의 총성 뒤에서, 그리고 이름 없이 스러진 말년의 침묵 속에서 그대가 붙들고 있었던 질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오늘 우리가 다시 홍종우를 읽는 이유는 그 답을 마침내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질문을 우리 시대의 질문으로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곧 제주목사, 도지사를 뽑는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여러 사람이 그 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한 가지를 묻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이 땅에 목사로 내려왔던 홍종우와 같은 치열한 시대의식을 과연 가지고 있는가.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순을 끝까지 직시하고 고쳐보려는 결연한 의지, 기득권의 저항을 감수하면서도 제도의 이름으로 백성의 삶을 바꾸려 했던 그 집요한 문제의식이 과연 그대들에게 있는가.

고충석
現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 제주국제대학교 초대 총장, 제주발전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원로학자로서 칼럼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노마지지(老馬之智)의 조언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