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는 EV, 커지는 ESS…배터리 판도, ‘정책’이 가른다
中 LFP 저가공세 계속…국내 기업, 북미 ESS·제품 다변화가 승부처
북미 공장 가동률·LFP 전환 속도 따라 실적 반등 시점 달라질 듯

| 서울=한스경제 김창수 기자 | 한때 산업계 기대를 한 몸에 받던 2차전지 산업이 성장 일변도 대신 '지역별 차별화' 국면에 들어선 모양새다. 전기차(EV) 시장 성장세가 예전만 못한 가운데 미국은 정책 후퇴로 수요가 식은 반면 유럽은 규제와 보조금 재개를 바탕으로 유지 흐름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중국 업체들 저가 공세가 거세지며 국내 배터리 업계는 마냥 수요 회복을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이로써 업황 핵심 변수는 전기차 판매 반등보다 북미 공장 가동률 제고 및 에너지저장장치(ESS)의 전기차 부진 상쇄 여부에 달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 상반된 전기차 정책 펼치는 美-유럽…기로에 선 K-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2차전지·소재 기업 9곳 2025년 합산 영업손실은 약 2조원으로 전년보다 적자 폭이 더 커졌다.
그동안 국내 업체들은 제한적인 중국 시장 진입 대신 미국·유럽 시장에 역량을 집중해 왔다.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매출에서 이 두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만 60~70%에 이른다.
문제는 최근 미국과 유럽 정책 방향이 엇갈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같은 전기차 시장이라도 지역과 차종에 따라, 또 어떤 배터리를 공급하느냐에 따라 명암이 갈리는 구조가 뚜렷해졌다.
미국 시장은 가장 큰 변수로 꼽힌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세액공제와 배터리 보조금이 전기차 확산 동력이었지만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흐름이 달라졌다. 7500달러 연방 전기차 세액공제가 지난해 9월 종료되며 미국 내 전기차 판매는 눈에 띄게 둔화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9.6%에서 올해 초 기준 6.5%까지 떨어졌다. 완성차 업체들도 공격적인 전동화 전략 대신 하이브리드와 내연기관 수익성 방어 쪽으로 무게추를 옮기고 있다. 국내 배터리 업체 입장에서는 북미에 대규모 생산거점을 먼저 깔아 놓고도 정작 전기차 수요가 기대만큼 받쳐주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는 셈이다.
유럽은 사정이 조금 다르다. 유럽연합(EU)은 2025년부터 적용된 자동차 탄소배출 규제를 2025~2027년 3년 평균으로 맞출 수 있게 완화했지만 전동화 방향 자체를 되돌리진 않았다. 승용차 평균 배출 목표는 2025~2029년 93.6g CO2/km, 2030~2034년 49.5g CO2/km로 유지되고 있다.
독일은 올해부터 소득 기준에 따라 최대 6000유로 전기차 보조금을 재도입했다. 영국도 3만7000파운드 이하 차량을 대상으로 최대 3750파운드 전기차 보조금 제도를 운영 중이다. 프랑스 역시 유럽산 배터리를 장착한 전기차에 추가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지원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유럽 전기차 시장 회복이 국내 업체에 곧장 호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최근 유럽 전기차 수요는 중대형 프리미엄보다 소형·준중형 중저가 모델 중심으로 살아나는 흐름이다. 이는 하이니켈 중심 포트폴리오를 가진 한국 업체들에는 오히려 부담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중국 시장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배터리 생산능력은 2.8TWh로 2020년 대비 13.7배 늘었으며 같은 해 사용량의 약 2.5배 수준에 달했다. 공급 과잉이 해소되지 않는 한 중국 업체들 수출 공세와 해외 현지화 전략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4년 리튬인산철(LFP) 배터리가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가격 경쟁력이 뛰어난 LFP가 전기차 대중화 핵심 축으로 떠오르며 원가 측면에서 유리한 중국 업체들이 비(非)중국 시장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국내 업체들로선 미국의 대중 견제가 버팀목이지만 유럽과 동남아 등지에선 가격 압박을 피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 대안으로 떠오른 ESS 시장…북미 판매량에 향후 업황 좌우될 듯
최근 업계가 '출구 전략'으로 주목하는 분야는 ESS를 들 수 있다. 최근 수년간 ESS 배터리 시장 성장률이 전기차용 시장을 크게 웃돌며 전체 배터리 시장에서 ESS 비중이 과거 10% 안팎에서 최근 25% 수준까지 커진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미국은 중국산 ESS 배터리 관세 인상과 함께 프로젝트 투자세액공제(ITC),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금지외국기관(PFE) 규정 강화 등을 통해 현지 생산 배터리 경제성을 높이고 있다.
우드맥킨지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ESS 설치량은 18.9GW, 51GWh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로써 전기차 성장률이 기대만큼 나오지 못하는 북미 시장에서 ESS가 국내 배터리 업체 가동률 '방파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결국 국내 업체들로서는 북미 ESS 물량 확보를 통해 미국 공장 가동률을 얼마나 회복하느냐가 관건으로 꼽힌다. 아울러 장기적으로는 LFP 전환 및 비중국 공급망 재편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느냐도 문제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셀 3사 가동률이 최근 50%대에 머물고 있으며 건설 중인 자산 비중도 높아 추가 물량 확보 부담이 여전하다"며 "시장 기대가 낮아진 상황에서 2차전지 산업은 더 이상 '전기차 성장산업'으로 규정하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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