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양치기 소년’ 트럼프 안 믿어··· 호르무즈의 기이한 평온

4월12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국 해군에 “이란에 통행료를 낸 모든 선박을 나포하라”고 전격 지시했다.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이란 측과 종·휴전 협상을 벌이던 J.D. 밴스 부통령이 ‘협상 결렬’을 선언한 직후였다. 당시에도 중국·인도·파키스탄·타이 등 이른바 ‘중립국’의 선박 일부가 이란의 묵인하에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트럼프는 이 선박들이 이란의 해협 통제권을 인정(이란에 통행료를 상납)하는 행위로 미국의 해상 통제권을 무시했다고 확신했을 터이다. 그의 격노는 즉각 페르시아만을 오가는 ‘모든 선박에 대한 나포’, 즉 ‘전면적 해상 봉쇄’ 선언으로 시장에 타전되었다. 이란의 국지적 해협 통제에 미국의 전면 봉쇄가 얹히자 글로벌 석유 공급망 붕괴의 공포가 시장을 덮쳤다. 배럴당 90달러대 중반이던 브렌트유 선물 가격이 단숨에 심리적 저항선인 100달러를 돌파했다.
트럼프의 ‘전면 봉쇄’, 미 해군의 ‘선별 봉쇄’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아무리 격노해도 현장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오만만(灣)과 아라비아해(아라비아반도와 인도 사이의 바다)에 포진한 미군 중부사령부(CENTCOM: 중동,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일부를 전담)는 지시 다음 날인 4월13일부터 ‘해상 봉쇄’에 돌입했다. 그러나 그 작전 지침은 트럼프의 과격한 수사와 결이 한참 달랐다. 봉쇄(차단·나포·압류)의 대상을 “이란 항구와 연안 해역을 통과하는 모든 선박”으로 한정 지은 것이다. 확전을 우려한 미국 군부가 이란의 석유 수출 루트만 옥죄어 이 나라의 경제적 질식을 유도하는 일종의 ‘선별적 봉쇄’로 수위를 조절한 셈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개전 이후 최근까지 이란의 석유 수출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글로벌 석유 공급이 줄어 유가가 오르면 그 최대 피해자는 트럼프 자신이 될 터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석유 수입보다 수출이 많은 순수출국이지만, 미국의 유가 역시 글로벌 유가를 따라 움직인다. 유가 폭등은 미국 물가를 크게 올려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트럼프에게 치명상을 입힐 터였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적 공격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란의 외화 수입원(원유 수출)을 말려 경제적 생명선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미국의 협상력을 높이려 한다고 보인다.
그런데 미군의 해상 봉쇄가 개시된 4월13일부터 시장은 오히려 진정 국면을 맞는다. 브렌트유 선물 가격이 다시 배럴당 90달러대로 내려갔다. 미국과 유럽 증시는 4월15일 오후(한국 시각)까지 오름세를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트럼프의 봉쇄 발언 직후에는, 이란과 미국의 봉쇄가 겹치면서 브렌트유 가격이 4월 말 150달러에 근접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 바 있다. 더욱이 이란이 사우디아라비아 동서 송유관 파괴와 후티 반군의 수에즈 운하 타격 등 세계 물류를 멈춰 세울 보복 카드까지 내놓은 상황이다. 이 동서 송유관은 사우디 동쪽 유전에서 홍해 연안의 항만까지 육로로 이어져 있는데,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는 경우, 원유를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빼내는 생명선으로 여겨져왔다. 친이란 무장 집단인 예멘의 후티 반군이 홍해 입구를 봉쇄하면 수에즈 운하(아시아와 유럽의 물류를 잇는 핵심 해로)까지 막아버릴 수 있다. 이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수준의 재앙을 세계경제에 초래할 수 있다.

시장의 트럼프 무시로 굴러가는 글로벌 경제
이런 절체절명의 리스크 앞에서도 글로벌 경제가 ‘이질적 평온함’을 누릴 수 있는 이유가 있긴 하다. ‘양치기 소년’과 다를 바 없는 트럼프에 대한 냉소와 학습효과의 결과다. ‘이란 발전소 초토화’ ‘이란 문명 절멸’ 같은 폭탄 발언들을 조변석개로 쉬지 않고 떠들어대다가 ‘데드라인’이 다가오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패턴을, 시장이 학습해버린 것이다. 월스트리트는 이번 봉쇄 지시 역시 군사적 결단이 아니라 협상용 블러핑(협박)이나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지지자 결집용 쇼’로 깎아내리고 있다. ‘봉쇄’라는 무서운 단어로 체면을 세우려는 트럼프의 헛소리를, 글로벌 금융 시스템이 적당히 무시하며 세계경제를 굴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미군 중부사령부의 ‘선별적 봉쇄’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이란과 거래한 혐의로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 중국 연계 선박 리치 스타리(Rich Starry)호는 봉쇄 발효 직후인 4월14일, 메탄올 25만 배럴을 싣고 여봐란듯이 해협을 빠져나왔다. 또 다른 제재 대상 유조선 무를리키샨(Murlikishan)호는 이란 혁명수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이라크 항만으로 항행 중이다. 미군의 공식적 봉쇄 대상이 “이란 항구와 연안 해역을 통과하는 모든 선박”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제재 대상 선박까지 걸러내지 못할 정도인 것이다. 압도적 무력을 자랑하는 미국 해군이 확전 부담과 지리적 한계 속에서 의도적인 ‘태업’을 하고 있거나, 애초에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방증이다. 미국 해군 전력만으로 봉쇄할 만큼 아라비아해 일대가 좁지는 않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의 해상 봉쇄가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영국·프랑스 등 나토(NATO) 동맹국들은 트럼프의 일방적 해상 봉쇄에 사실상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트럼프를 배제한 ‘다국적 해상 구상’을 통해 이란과 외교적 중재를 중심으로 독자적 해상 안전망 구축을 모색 중이다. 트럼프의 봉쇄는 이란이 아닌 미국 자신을 동맹국들로부터 철저히 ‘봉쇄’하고 있는 셈이다.
재협상 가능성에 기대는 ‘기이한 평온’
지금 시장을 지탱하는 마지막 동아줄은 4월17일을 기점으로 한 주말 사이, 미국과 이란이 다시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 것이라는 막후의 기대감뿐이다. 이 ‘기이한 평온’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다. 트럼프 대통령과 이란은 둘 다 예측 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미군이 봉쇄 작전을 돌연 강화하거나 이란이 걸프 국가의 항만·유전을 공격하거나 혹은 이스라엘의 돌발 행동, 후티 반군의 홍해 입구 선박 공격 등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 중 단 하나의 뇌관만 터져도 시장은 경련을 방불케 하는 상태로 빠져들 것이다. 4월15일 오후 현재의 시장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감행 중인 곡예사와 다를 바 없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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