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파민 중독 시대, 로맨스도 가성비로? [콘텐츠의 순간들]
1990년대, ‘미연시’라는 게임 장르를 알게 됐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의 약자다. 1994년 코나미의 〈두근두근 메모리얼〉로 대중화된 ‘미연시’는 게임 속 캐릭터를 고르고, 게이머가 대사와 상황을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진행된다. 현실의 연애는 진심을 다해도 실패하거나, 사소한 실수 하나로 모든 것이 망가지기도 하며, 노력의 대가는 불투명하고 상대의 마음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미연시’는 제대로 ‘공략’하기만 하면 확실한 행복을 보장받는다. ‘미연시’는 단순한 연애 게임을 넘어, 이후 ‘모에’ 문화와 캐릭터의 발원지가 되었다.
2010년대 들어 ‘미연시’ PC 패키지 시장은 침체했지만, ‘연애 게임’의 욕망은 게임을 넘어 모든 미디어로 확장되어 더욱 강력해졌다. 〈나는 솔로〉와 〈솔로지옥〉 같은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시청자가 직접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전지적 시점에서 공략법을 토론하는 실사판 ‘미연시’라고도 볼 수 있다. 유튜브에는 달콤한 말로 속삭이는 ‘남친 ASMR’이 인기이고, 버추얼 유튜버가 나의 메시지를 읽고 즉각 반응해준다. AI는 정서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모든 것을 공유하는 연인이 되기도 한다. 일본에는 현실의 인간과 데이트하는 ‘렌털 남친/여친’ 서비스가 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볼 수 있는 〈내일, 나는 누군가의 여자친구〉(2022)는 렌털 여친 서비스를 소재로 한 드라마다.

신화와 전설 속 사랑 이야기, 〈폭풍의 언덕〉과 〈오만과 편견〉, 할리퀸 로맨스까지 인간은 항상 가상 연애에 마음을 주어왔다. 지금은 모든 연애의 상황을 가상으로 버라이어티하게 체험할 수 있는 시대다. 우리가 가상 연애에 열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현실의 연애는 지나치게 피곤하고, 불확실하며, 때로는 상처만 남기니까. 현실 연애는 싸워가며 이해하고, 맞춰가며 가까워지는 과정에 엄청난 에너지를 들이지만, 가상 연애는 내가 원할 때 켜고 싫을 때 끌 수 있다. 무엇보다 거절당할 공포나 이별의 상처가 없다. ‘실패해도 리셋할 수 있다’라는 심리적 안정감이 우리를 가상 세계로 이끈다.
최근 인기를 끈 넷플릭스 〈월간 남친〉은 인류 최강 도파민 ‘연애’의 쾌감을 21세기 방식으로 그려냈다. 드라마의 설정은 단순하면서 도발적이다. 가상 연애 구독 서비스인 ‘월간 남친’을 통해 매달 새로운 연인을 제공받는다. 퇴근 후 주어지는 몇 시간의 자유. 그 소중한 시간에 웹툰 주인공보다 더 매력적이고 황홀한 남자가 나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누가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로맨스의 클리셰를 비틀고 확장하기에 최적의 구조를 끌어들인 〈월간 남친〉의 성적은 눈부시다. 공개 직후 한국 넷플릭스 1위는 물론, 전 세계 34개국 톱 10에 진입했다. 공개 초반 로튼토마토 팝콘 지수 90%대는 대중의 니즈를 정확히 공략했음을 증명한다. 해외에서도 ‘로맨틱 코미디의 진부함을 비튼 신선한 시도’라는 호평이 나왔다.
클래식과 클리셰는 한 끗 차이
남궁도영 작가는 〈월간 남친〉이 ‘인간과의 연애에서 생기는 리스크를 두려워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웹툰 PD인 주인공 서미래는 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이었다가 깨지고 상처를 받고 싶지 않아 다시 연애하지 않았다. 서미래는 ‘타인의 로맨스’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우연히 ‘월간 남친’의 리뷰를 부탁받아 경험하면서 깨닫게 된다. 가상의 연애에 왜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지.

즉각적이고 안전한 자극을 갈망하는 시대에 ‘월간 남친’은 건방진 재벌 3세, 다정한 대학 선배, 위험한 국정원 요원 등 온갖 판타지를 집대성하며 대중을 사로잡는다. 누군가는 뻔한 클리셰라 비난하겠지만, 드라마 소제목에도 나오듯 클래식과 클리셰는 한 끗 차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움직이는 공식이기에 클래식이 되었고, 무차별적으로 반복하기에 클리셰가 된 것이다.
〈월간 남친〉의 재미는 조연도 한몫한다. 미래가 담당한 웹툰 작가 윤송은 최고로 매력적인 캐릭터와 극적인 로맨스를 창조해 독자를 사로잡지만, 정작 현실 연애는 최악이다. 그러므로 가상의 연애에 푸욱 빠져든다. 미래의 친구 지연은 현실에서 수없이 소개팅과 연애를 반복하며 헤어지고 절망하다가, ‘월간 남친’을 구독하자 날개를 단 듯 남자 공략법을 깨치며 게임의 고수가 된다. 공략법을 사방팔방으로 전파하며 가상 연애를 하나의 ‘스포츠’처럼 즐기는 지연은, 관계의 정답이 부재한 시대의 생존 방식을 제시하는 선구자처럼 보인다. 김정식 감독은 ‘미래는 현실의 사랑을 선택했고, 윤송 작가는 가상 세계의 사랑을 택했으며, 지연은 두 가지 모두를 받아들인다. 사랑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다’라고 말했다. 세 인물의 선택이 나란히 놓일 때, 드라마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선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가상이다. 미래만이 아니라 많은 구독자가 묻는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요?’라고. 답은 간단하고도 서늘하다. ‘당연히 잘해야죠, 구독자님인데.’ 이건 본질적인 질문이다. 아프고, 힘들고,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끊임없이 쏟아부어야 하는 현실의 연애, 돈만 내면 완벽한 배려와 설렘을 제공하는 가상의 연애 중 무엇이 더 나에게 가치 있을까? 상업적 게임으로서의 연애는 우리에게 감정의 가성비는 물론 짜릿한 도파민을 제공하지만, 진심은 무엇이고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묻게 만든다.
〈월간 남친〉은 현대 젊은 남녀의 연애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외로움을 로맨틱 코미디라는 가벼운 그릇에 잘 담아냈다. 마지막까지 보고 나면 알게 된다. 연애도, 인생도 클리셰의 연속이라는 것을. 중요한 건 뻔한 클리셰 속에서 조금씩 변주를 주며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월간 남친〉은 가짜 연애를 통해 진짜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드라마다.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리스크를 감수하거나, 혹은 판타지를 구독하며 각자 정답을 찾아갈 뿐이다.
김봉석 (대중문화 평론가)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