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질병, 규범적 판단 기준의 법제화와 그 너머

지난 7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김주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사회통념에 따라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인정'할 수 있다는 판단 기준을 법률에 명문화하는 데 있다. 대법원은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될 필요는 없고,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그 입증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오래도록 유지해 왔다. 그러나 이 판례 법리가 정작 법령에는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의식이 이번 개정안의 출발점이다.
이른바 '규범적 상당인과관계 판단'이란, 의학·자연과학이 밝힐 수 있는 인과관계를 전제로 하되, 해당 근로자의 건강 상태·업무 내용·노동강도·스트레스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해 사회통념상 인과관계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가치판단으로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법원은 질병의 주된 발생 원인이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업무상 과로나 스트레스가 겹쳐 질병을 유발·악화시킨 경우 인과관계를 인정해 왔으며, 판단의 기준도 '보통 평균인'이 아닌 해당 근로자의 개별적 사정에 두어야 한다는 법리를 거듭 확인해 왔다. 증명책임은 여전히 근로자에게 있지만, 판례는 인과관계의 내용을 의학적 엄밀성보다 규범적 상당성을 중심으로 완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그 결과 근로자가 업무 내용·노동환경·발병 경위 등을 충분히 제시하면 법원이 상당한 추단에 근거해 규범적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구조가 형성돼 왔다.
문제는 이 구조가 실무에서 온전히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규범적 판단은 법관의 전유물이 아님에도, 처분 및 행정심판 단계에서는 이를 법원에 미루는 경향이 적지 않다. 법원 역시 언제나 규범적 관점을 충실히 구현해 왔다고 보기 어렵다. 특별한 이유제시 없이 임상의학 감정을 직업환경의학 감정보다 우선 취신(取信)한 사례, 장애를 가진 근로자의 특수한 신체 조건을 도외시한 채 육체적 강도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뇌심혈관질환의 위험성을 부정한 사례 등 규범적 판단이라 보기 어려운 하급심 판결은 드물지 않다. 민사소송법상 당사자가 다투지 않은 쟁점에 법원이 개입할 수 없다는 구조적 한계까지 고려하면 규범적 판단은 법원보다 오히려 원처분과 행정심판 단계에서 더 용이하게 실현될 수 있다.
입법과 하위법령 개정이 가져올 긍정적 효과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풀 수 없는 문제도 있다. 하위법령 기준은 한정된 산재보험 재정을 누구에게 어떤 순서로 배분할 것인지,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성격도 지닌다. 따라서 기준이 구체화될수록 표준적인 사건의 처리는 수월해지겠지만, 기준이 포섭하지 못하는 사건들은 여전히 남기 마련이다. 규범적 판단이 요청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 판단을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재해조사 담당자를 비롯해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산재심사위원회·고용노동부 재심사위원회에 이르기까지 각 처분 단계의 관여자들이다. 법령이 아무리 정교하게 개정된다 해도, 기준을 실제 사건에 적용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따라서 관여자 각자가 산재보험 제도의 의의와 목적을 깊이 이해하는 것은 법령 개정으로 대체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과제다. 각 위원회가 산재보험 실무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돼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재해조사 담당자마다 경험칙이 다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규범적 평가 기준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와 기존 법리의 숙지가 함께 요구된다. 예컨대 종교적 신념에 기초해 자해나 자살은 어떠한 경우에도 산재가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이가 처분에 관여한다면 법령에 어떤 조문을 추가하더라도 규범적 판단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번 개정을 통해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돼야 할 사건들이 신속히 처리되고, 그럼으로써 깊은 고민이 필요한 사건에 많은 자원이 할애되기를 기대한다. 다만 규범적 판단은 법령 조문을 통해 자동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며, 산재 승인을 보장하는 만능키도 아니다. 처분 과정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이 산재보험법의 본령—일하다 질병에 걸린 노동자가 조속히 치료받고 일터로 복귀하는 것, 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본인과 부양가족의 생계가 유지되는 것—을 깊이 새기고 각자의 역할을 책임 있게 다할 때, 비로소 규범적 판단이라는 도구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Copyright © Copyright © 2026 매일노동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