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다툼에 굴착기로 집 부숴” 유언장 부재가 남긴 ‘노윌 비극’

전남혁 기자 2026. 4. 16.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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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장 작성률 1%도 안돼 분쟁 증가
지난달 숨진 김미란(71·가명) 씨는 미혼으로 자녀가 없었다. 유언장 없이 아파트 한 채를 두고 떠나자 형제와 조카 등 10명이 상속인이 됐다. 수십 년간 왕래가 없던 이들 중 일부는 해외에 있거나 행방불명 상태였다. 아파트 처분엔 상속인 모두가 합의해야 했지만 불가능해 유족은 결국 변호사를 선임해 상속재산 분할 소송에 돌입했다. 유언장 한 장이면 피할 수 있었을 소모전이다.

15일 금융감독원 등에 따르면 국내 60세 이상 고령층 자산은 2022년 3684조 원에서 지난해 4604조 원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유언장 작성률은 채 1%가 되지 않은 것으로 추산된다. 부의 이전 규모는 커지고 있지만 사후 설계는 전무한 셈이다.

유언장을 남기지 않으니 자연히 분쟁도 늘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상속재산 분할 사건은 2014년 771건에서 2024년 3075건으로 크게 늘었다. 상속 전문 이양원 부천종합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가족 구조가 파편화할수록 소액의 유산 분배도 유언장에 명확히 남기는 게 중요하다”며 “공공기관이 유언장 작성과 등록, 보관을 지원할 때가 됐다”고 했다.

시니어 머니 4600조 시대, ‘유산 전쟁’ 10년새 4배로

[유언 없는 유산 전쟁]
‘유산 전쟁’ 10년새 4배로… “죽음은 먼 얘기” 유언장 작성 미뤄
유족간 법정 소모전… 범죄 비화도
“유언장 자필로 쓰고 날인해야 효력… 작성과정 영상녹화-공증도 효과적”

형제와 조카만을 상속인으로 남기고 떠난 김 씨의 사례는 한국 사회 내 ‘노 윌(No Will·유언장 없는 죽음)’ 비극의 전형이다. 고령 1인 가구와 자녀가 없는 ‘딩크족’이 많아지고 친척 간 교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준비 없는 이별은 곧장 법정 소모전으로 직결된다. 전문가들은 유산 분쟁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급증하는 상황을 막으려면 유언장 작성을 기피하는 인식을 개선하고, 유언장 작성의 문턱을 낮춰줄 공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 ‘시니어 머니’ 4600조 원, 갈등의 씨앗으로

민법상 유언장 없이 사망하면 유산은 법정 순위대로 분배된다. 1순위 자녀, 2순위 부모, 3순위 형제자매 순이다. 배우자는 1·2순위와 공동 상속하며 50%를 가산받는다. 문제는 ‘기여도’다. 상속인 중 누군가 “내가 고인을 더 극진히 모셨다”거나 “재산 형성에 더 기여했다”며 유산을 더 받겠다고 나서는 순간 소송전이 시작된다. 상속 분쟁은 통상 변호사 수임료 등 1000만 원 안팎의 비용이 들고 결론까지 1, 2년이 걸린다.

고령층 자산이 늘면서 분쟁도 늘어나는 추세다. 국가데이터처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60대 이상 가구주는 2022년 762만 명에서 지난해 859만 명으로 늘었는데, 이들의 평균 순자산도 같은 기간 4억8327만 원에서 5억3591만 원으로 증가했다. 지난해 기준 4600조 원이 넘은 ‘시니어 머니’는 낮은 유언장 작성률과 맞물려 갈등의 씨앗이 되는 형편이다. 소순무 유언법제변호사모임 회장은 “유언장을 쓰는 성인은 1% 미만으로 추정된다”며 “죽음을 ‘먼 얘기’로만 보고 혐오하는 인식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유언장을 남기지 않아 격화한 갈등은 범죄로 번지기도 한다. 지난해 한 남성은 아버지가 남긴 집을 굴착기로 부순 혐의(재물손괴)로 기소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2001년 아버지가 숨진 뒤 집 소유권을 두고 다른 유족과 갈등하다가 조카가 집을 매도하자 이에 항의하며 범행했다. 그는 “아버지가 생전 나에게 주기로 한 집”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장이 없었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유언장이 있어도 본인 의사로 작성했다는 증거를 명확히 남기지 않으면 상속받지 못한 유족이 ‘치매에 의한 것’이라며 무효를 주장하기도 한다. 장남과 손녀에게 재산을 모두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2016년 숨진 한 노인의 사례가 그랬다. 가족은 “아버지가 의사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작성했다”며 유언무효 확인청구를 제기했다.

● “‘미리 유언장 쓰기’ 인식 높여야”

전문가들은 후손의 분쟁을 예방하고 뜻대로 유산을 나누기 위해 민법상 효력이 인정되는 유언장의 작성법을 숙지해 미리 작성해 두길 권장한다. 녹음이나 구술도 효력이 있지만 인정 요건이 상대적으로 까다롭다. 가장 접근성이 좋은 건 자필 유언장이다. 반드시 자필로 써야 하며 유언을 완성한 날짜와 주소, 이름을 적고 도장과 지장으로 날인해야 한다. 서명은 허용되지 않는다. 작성 과정을 동영상으로 녹화해 두는 것이 사후 무효 주장을 막는 방법이다. 증인 2명을 대동한 채 공증인 앞에서 공정증서 형태로 유언장을 남겨도 효력이 확실하다.

유언장은 젊을 때 작성해도 효력이 있다. 다만 내용을 바꿀 땐 자필로 고친 부분과 날짜를 표시해 날인해야 하고, 많은 부분을 고칠 거라면 기존 작성분을 폐기하고 새로 쓰는 게 낫다. 이 변호사는 “유언장은 사후 분쟁의 ‘백신’이나 다름없다”라며 “작성 시기는 큰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나 삶을 정리해 보고 싶을 때 등으로 자유롭게 정하면 된다”고 했다.

개인의 노력을 넘어 유언장을 안전히 보관할 수 있는 등록·보관 제도 등 공적 지원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온다. 영국에선 법원이 직접 유언장을 보관해 준다. 미국은 일리노이주 등에서 행정기관이 유언 등록 서비스를 제공한다. 서종희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공신력 있는 기관에 유언자가 직접 방문해 유언장을 접수시켜 보관할 경우 실제 작성자가 유언장을 작성했는지에 대한 다툼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남혁 기자 forwar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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