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문제는 기름값이야, 바보야”
휘발유값 4달러 넘자 휴전
美 대통령도 통제 못하는
기름값이 정권 운명을 좌우

미국 정치권에는 “유가가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기름값이 오르면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고 집권당이 선거에서 패하기 십상이란 것이다.
국제 유가는 산유국의 감산 결정이나 지정학적 분쟁, 글로벌 경기 등 복합적 요인의 영향을 받지만, 미국 유권자들은 기름값 오른 책임을 대통령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 래리 사바토 버지니아대 정치학 교수는 “기름값은 대통령의 지지율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지만, 역설적으로 대통령이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변수”라며 이런 현상을 ‘주유소 전광판의 저주’라고 불렀다.

미국 기름값은 단순한 물가 지표 그 이상이다. 전국에 촘촘하게 깔린 15만개의 주유소 입구에 세워진 전광판이 24시간 휘발유와 경유값을 노출한다. 며칠에 한 번 장을 볼 때나 체감할 수 있는 식료품 물가와 달리 기름값은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자동차가 생활필수품인 미국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접하는 ‘실시간 경제지표’다.
역사적으로 유가 급등은 집권당에 불리하게 작용한 경우가 많았다. 1978년 이란 혁명으로 촉발된 2차 오일 쇼크는 배럴(약 159ℓ)당 12달러 선이던 국제 유가를 단숨에 31달러 선으로 급등시켰고, 카터 대통령은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 레이건 후보에게 선거인단 489대 49라는 압도적 패배를 당했다.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이 사상 최고치인 배럴당 147달러를 찍은 2008년에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휘발유 평균 소매가격이 갤런(약 3.8ℓ)당 4달러를 넘었고, 11월 대선은 민주당 오바마 후보의 완승으로 끝났다.
트럼프도 유가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기름값이 오르지 않도록 각별히 관리해 왔다. 지난해 2월 캐나다를 상대로 25%의 보편 관세를 부과할 때 캐나다산 원유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관세율을 10%로 낮췄다. 트럼프가 지난 1월 마두로를 체포한 것도 세계 최대 매장량을 갖고 있는 베네수엘라 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는 관측이 많다.
기름값은 지금 이란 전쟁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키워드다. 트럼프는 “이란 석유를 갖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미국의 압도적 승리가 예상되던 전쟁 초기에 국제 유가가 배럴당 70달러에서 110달러로 급등했지만, 트럼프는 “미국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다. 유가가 오르면 미국은 엄청난 돈을 번다”고 했다. 하지만 4월 들어 미국 휘발유 가격이 심리적 마지노선인 갤런당 4달러를 넘자 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멍청이들만이 이 전쟁의 가치를 기름값 몇 센트와 비교한다”는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더니, 지지율이 취임 후 최저치인 36%로 곤두박질치자 이란과 휴전에 합의했다.
이란도 기름값이 미국 아킬레스건이라는 점을 꿰뚫고 있다. 이란 국회의장은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 미국인들은 갤런당 4~5달러 수준의 휘발유 가격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라며 미국 민심 흔들기에 나섰다.
공화당은 이달 초 텃밭인 조지아주 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지난 대선 때 37%포인트였던 득표율 격차가 11.8%포인트로 격감했다. 공화당 내부에선 이란 사태가 장기화되면 11월 중간선거에서 상·하원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에게 세 번이나 투표했다는 펜실베이니아의 한 유권자는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이제 트럼프를 쓸모없는 존재라 부르겠다”며 분노를 쏟아냈다.
클린턴은 1992년 대선에서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을 상대로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슬로건으로 승리했다. 이란 사태가 조기 종료되지 않을 경우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의 슬로건은 “문제는 기름값이야, 바보야”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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