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도 “이제 미국 못 믿겠다” ‘유럽판 나토’ 안보 구상 급물살
메르츠 총리, 반대 입장 뒤집어
위성·감시·경보 체계 대체 숙제
유럽 국가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탈퇴 위협에 맞서 독자적 방위 체계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간 이 같은 구상에 완강히 반대해온 독일이 최근 입장을 뒤집으면서 이른바 ‘유럽판 나토’ 논의가 결정적 전환점을 맞았다는 것이다.
14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유럽판 나토’라고도 부르는 이 구상의 핵심은 나토의 기존 지휘·통제 체계를 그대로 유지하되, 핵심 역할을 점진적으로 유럽이 맡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 자산이 빠진 자리를 유럽 자체 전력으로 채우고 더 많은 유럽 장교들이 나토의 지휘 체계 안으로 들어오는 방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위협해온 대로 미국이 유럽 주둔 병력을 철수하거나 나토 조약의 집단방위 조항 이행을 거부하더라도 대러시아 억지력, 작전 연속성, 핵 억지력에 대한 신뢰성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지난해 처음 구상된 이 계획은 트럼프 대통령이 덴마크령 그린란드 병합 야욕을 드러낸 후 가속화됐고, 미·이란 전쟁을 둘러싼 미·유럽 간 갈등이 격화하면서 한층 더 긴박한 현안이 됐다.
지난 2월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나토가 지금보다 더 유럽 주도의 기구로 변모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과거에는 이런 변화가 미국의 요구나 압박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WSJ는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 동맹국을 “겁쟁이”라 부르고 나토를 “종이호랑이”라고 깎아내리는 상황에서 유럽이 스스로 생존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이 구상이 현실적 동력을 얻게 된 결정적 계기는 독일의 태도 변화다. 미군 핵무기가 배치돼 있는 독일은 수십년간 프랑스 주도의 유럽 안보 자율화 논의에 반대해왔다. 유럽이 독자 방위 역량을 키우면 미국에 발을 뺄 구실을 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WSJ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지난해 말부터 이 같은 입장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사실상 포기할 준비가 돼 있다고 판단한 데다, 미국이 전쟁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혼동하고 나토 내 미국 정책을 이끄는 뚜렷한 가치 기반이 사라졌다는 우려가 컸다는 것이다. 독일의 태도 선회로 영국, 프랑스, 폴란드, 캐나다도 이 비상계획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나토 회원국 중 최장인 1300여㎞ 국경을 맞댄 핀란드의 알렉산데르 스투브 대통령이 특히 이 구상에 적극적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다만 걸림돌도 만만치 않다. 나토의 현 구조는 병참과 정보에서 최고 군사 지휘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층위가 미국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위성·감시·미사일 경보 체계를 단기간에 유럽이 대체할 수는 없어 프랑스와 영국이 핵전력과 전략 정보 역할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는 숙제도 있다. 대잠전·우주·정찰 능력, 공중 급유, 전략 공수 등 수십년간 미국에 기댄 분야에서의 격차가 큰 것도 문제다.
유럽은 미·이란 전쟁을 계기로 미국과 차별화된 독자 행보를 더욱 분명히하는 분위기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17일 호르무즈 해협 항행 재개를 위한 국제화상회의를 공동 주최한다. 이 회의에 미국은 참여하지 않는다. AFP통신에 따르면 프랑스 대통령실은 이번 회의가 “순전히 방어적 임무에 이바지할 의사가 있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며 “안보 상황이 허락하는 시점에 호르무즈의 항행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 총리실 역시 “분쟁 종료 이후 국제 해운 보호를 위한 조율되고 독립적인 다국적 계획을 진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은경 기자 yam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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