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외트레일 ] 도시에서 산으로, 다시 원래의 나로
Part 03 / DAY 51–73 / 계획보다 흐름으로, 무게보다 마음으로
Day 60 계획은 흐름이 된다
[<사람과 산> 서경석 객원기자] 매일 저녁, 나는 혼자만의 회의시간을 가진다. 내일은 어디까지 걷고, 어디서 잠들며, 어느 지점에서 물을 보충하고, 어떤 마을에서 resupply를 할 것인지. 종주 전에 전 구간을 촘촘히 계획했지만, 길 위에서 몇 주를 보내고 나니 그것들이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그대로 흘러가진 않으니까.
계획은 '방향'을 위한 것이지 '답안지'는 아니다. 하지만 머릿속에 큰 숲의 윤곽을 그려두는 일, 그건 여전히 나에게 안정과 방향성을 준다. 어제 나는 오늘 걸을 거리가 27km라는 것을 알고 이렇게 생각했다.
"조금 여유롭겠군. 조금 더 누워 있을 수 있겠군."
실제로 그런 생각들은 내 몸을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27km를 '여유롭다'고 느끼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낯설다. 이제는 마을에 가서 제로데이를 가지면 몸이 아프다. '나는 계속 걸어야 하는 운명인가'라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나의 몸과 마음이 그만큼 길에 길들여졌다는 뜻이리라. 밤새 비가 조금 내렸지만 땅은 그것조차도 삼켜버린 듯했다. 바싹 마른 숲길을 걸으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 좀 더 와도 돼."
그러나 하늘은 침묵했고, 걷는 내내 갈라진 흙을 보며 마음이 쓰라렸다. 늦은 오후, 낡은 검문소처럼 생긴 쉘터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 하늘이 마침내 열리며 빗줄기가 쏟아지며 숲을 적시기 시작했다. 자리가 없어 결국 텐트를 쳐야 했지만, 그 빗소리는 나에겐 너무도 따뜻하게 들렸다.



Day 63 BBQ Day, Korean Magic on the Trail
오늘은 오래도록 꿈꿔온 코리안 바비큐 트레일 매직이 실현된 날이다. 그동안 트레일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트레일 매직을 받으며 '나도 언젠가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생겼다.
그래서 마을에 들를 때마다 콜라 한 캔, 맥주 하나라도 배낭에 넣어 NOBO들에게 "트레일 매직!"이라며 건넸던 날들도 있었다. 그 소소한 기쁨들이 모여, 마침내 함께 걷는 SOBO 6명(오클라호마, 하비월뱅어, 나탈리, ATM, 데이비스, 곤조)과 함께 잔치를 열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그 누구도 한국식 바비큐를 먹어본 적이 없다.
정오가 조금 지난 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오클라호마와 데이비스가 두 팔 벌려 방방 뛰며 나를 반긴다. 호숫가에는 완벽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이런 날씨, 이런 멤버, 이런 장소라니. 오늘은 분명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같았다.
불을 피우고 테이블을 차리는 사이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 모여 든다. 누군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누군가는 "진짜 하는 거였어?"라며 놀라워한다. 곧 삼겹살이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주, 막걸리, 쌈장과 김치, 그리고 왁자지껄한 하이커들의 대화들이 낯선 숲의 공기를 가른다.
"입안에서 살살 녹아"
"도대체 이게 뭐야? 무슨 고기가 이렇게 부드러워?"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얼굴들을 보며 내 손은 바쁘게 움직였지만 마음은 벅차올랐다. 4시간쯤 지나 테이블이 깨끗이 치워졌고 우리 모두는 배를 두드리며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은 곤조가 낭송한 월트 휘트먼의 <Song of the Open Road> 고요한 숲에 퍼지는 그의 음성 위로 우리는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트레일 에서 다시 보자"고 약속했다.



Day 67 도시에서 산으로, 다시 원래의 나로
충분한 휴식을 마치고 다시 트레일로 돌아왔다. 며칠간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잠을 자고, 언제든 뜨거운 물로 샤워할 수 있었고,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꿈처럼 멀게 느껴진다. 원래 이것이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소중한 부분들이 되어버렸다.
휴식이 길어지자 몸은 오히려 무거워졌다. 아픈 곳들이 생기고, 급기야 다래끼까지 났다. 빠졌던 체중도 2kg이나 다시 불었고, 도시의 탁한 공기 때문인지 머리까지 띵했다.
'내일은 진짜 가야해.'
며칠간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되뇌다가 드디어 오늘 아침, 다시 배낭을 짊어졌다. 몇 번이나 들었다 놓으며 무게를 조절했고, 앞으로 일주일의 스케줄도 가늠해보았다. 오전엔 속도가 꽤 붙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쯤엔 이미 많은 거리를 해냈다. 여유가 생기자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랜만에 숲과 대화를 시작했다.
내가 쉬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동안 나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들의 도움 덕분에 더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예정된 쉘터에 도착했을 땐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AT를 처음 알게 된 2010년. 뉴욕/뉴저지 구간을 하이킹하며 첫날 밤을 보냈던 바로 그 쉘터, High Point Shelter에 다시 도착했다. 그땐 thru-hiking이라는 개념조차 몰랐고, 트레일에서 마주치는 하이커들이 왜 저렇게까지 하며 걷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땀과 냄새, 무거운 배낭… 모든게 낯설기만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 이 길 위로 다시 돌아왔다. 쉘터엔 나 혼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묻곤 한다.
"혼자 산속에 있으면 무섭지 않아요?"
답은 생각보다 명확하다. 처음엔 그랬지만, 지금의 나에게 '무서움'은 사치다. 특히 SOBO로 걷는다는 건, 앞으로도 오랜 시간 혼자라는 뜻이고 어떤 상황이 와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쉘터 주변은 완전한 고요 속에 있었다. 벌레 우는 소리,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없다. 예전에도 나는 이 '고요'를 찾아 산을 찾곤 했다. 삶의 소음과 듣고 싶지 않은 말들, 말하지 않아도 될 말들에 지칠 때면, 이렇게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쉘터에 오기 8 km 전, Jim Murray Cabin에 잠시 들렀다. 물을 얻기 위해 들른 곳에서, 결국 한 시간 반을 앉아 풍경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AT를 1989년에 종주한 Jim이 직접 구입한 85에이커(약 10만평)의 땅 위에 지은 캐빈. 지금도 하이커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돈이란 결국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 돈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쓰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사용법 아닐까.


[ 해외트레일 ] ③ 길은 언제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에서 이어집니다.
글.사진 서경석 객원기자 ㅣ 미국 AT·PCT를 완주한 장거리 하이커. 해외 트레킹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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