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3충신’ 구성도호부사 전상의


- ‘광주 3충신’으로 불리다
무등산 자락에는 충장사만큼 큰 규모의 사당 충민사가 있다. 그리고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시작해 광주대교를 경유, 월산동 로터리에 이르는 구성로라는 도로도 있다. 충민사 앞을 지나는 사람마다 누구의 사당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처럼, 구성로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정묘호란 당시 구성도호부사였던 전상의 장군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구성로는 인조 5년(1627), 후금의 3만 대군을 안주성에서 막다가 장렬히 순절한 광주 출신 전상의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여진 도로명이고, 충민사는 그를 기리는 사당이다.


‘광주읍지’의 충신전에는 총 14분의 충절이 기록돼 있다. 그중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과 김덕령,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순절한 전상의 장군만이 나라로부터 충신의 정려를 받고 있다. 이 세 사람만이 충신의 정려를 받았기 때문에 광주의 3충신으로 불린다.
- 내금위 어모장군이 되다
전상의(全尙毅, 1575-1627)는 고경명, 김덕령에 비해 너무도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1575년(선조 8), 광주군 도천면(현 광주광역시 구동)에서 전용과 평산 신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한때 그의 집안은 명문이었다. 5대조인 구생은 광주 목사를, 7대조인 영좌는 전라도 관찰사를, 8대조인 익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그러나 부친과 증조부는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으며, 조부인 개는 기자전 참봉에 그치고 있다.
전상의가 태어날 무렵, 가문이 퇴락했음을 알 수 있다. 가문의 퇴락은 전상의로 하여금 분발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는 “신축년(1601) 봄 비로소 스스로 조신하고 바르게 하며 힘써 말하기를 우리 집안의 명성이 점차 쇠퇴해 가거늘 부귀는 또 어느 때에 구할 것인가? 문과 무의 장구한 법칙을 평소 행하여 익히 알고, 밤이 된즉 밝은 새벽까지 탐독했다”는 ‘충민사전공구성행장’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청년 전상의는 무너져 내린 집안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문무를 이미 닦고 있었으며, 새벽녘까지 글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전상의의 어린 시절의 행적을 알려주는 기록은 많지 않다. 단지 ‘충민사구성행장’에 “어린 시절 병정놀이 대장이 됐다”는 기록으로 보아 자못 장부의 풍모가 있었던 것 같다. 6세 무렵 도천면 조봉동(현 광주광역시 남구 봉선동)의 회재서당에서 박광옥에게 글을 배운다. 전상의의 학문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그가 남긴 글을 모은 ‘전상의 장군 실기’에 실린 시나 글을 보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전상의의 학문 수준이 상당했지만, 무예 솜씨 또한 대단한 실력이었다. 특히, 활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이는 “정묘호란 당시 백상루에 올라가 적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동시에 세 개의 화살을 쏘아 한 개의 빗나감도 없이 백발백중하니 오랑캐 병사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는 ‘광주읍지’ 충신조에 나오는 전상의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전상의가 문과가 아닌 무과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전상의는 29세 되던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한다. 급제 후 훈련원 주부를 거쳐 변방의 만호와 첨사 등 수군 장수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1618년(광해군 10) 내금위 어모장군에 발탁되면서 광해군을 보위하는 측근이 된다. 정3품 무관직인 어모장군은 임금의 호위와 대궐의 경비를 맡아보는 내금위 소속으로, 오늘날 청와대 경호실의 주요 직책에 해당한다.

- 안주성에서 순국하다
1616년 만주에서 건국된 후금과 조선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큰 마찰 없이 지낸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뀌고, 요동을 수복하려는 모문룡 휘하의 명나라 군대를 도왔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는 갑자기 멀어진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벌해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게 된다. 이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됐음을 주장하면서 군세가 약한 조선을 침략할 것을 종용한다.
1627년(인조 5) l월13일, 아민이 이끄는 후금의 군대 3만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기습 공략한 후 곽산의 능한산성을 무너뜨리고 청천강을 넘어 안주성에 도착한 것은 20일이었다.
의주가 침략당하자, 평안병사 남이흥은 주변의 제 군사를 안주성으로 모이게 했다. 남이흥과 안주목사 김준은 중영을, 구성도호부사 전상의는 남영을 수성하는 임무가 내려진다. 당시 전상의 휘하의 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당시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전상의 장군 실기’의 “적 군대의 기세가 매우 드높지만, 밖으로부터 개미 새끼 하나 구원해 주는 자가 없다. 군대의 강하고 약함이 서로 현격하게 차이가 나니, 승리의 도구는 오직 무기에 있을 뿐이다. 지금 모자라는 것이 무기이니 너희들은 함부로 낭비하지 말라. 적이 가까운 거리까지 도달해도 가벼이 발사하여 무기를 소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기록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위 기록은 당시 전상의 부대가 매우 어려운 환경에 처했음을 잘 보여준다. 군대의 규모뿐만 아니라 무기도 절대 열세였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첫날의 1차전은 조선군의 승리였다. 그러나 승리는 채 이틀을 채 버티지 못했다.
이튿날(21일), 적들이 대오를 정비해 안주성을 향해 진격해 오자, 평안병사 남이흥은 병졸을 시켜 화약고에 불을 질러, 김준 부자와 함께 불 속에 뛰어든다.

전상의 장군 최후의 모습을 ‘전상의 장군 실기’는 “장군(전상의)은 세가 이미 기울어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임금이 계시는 한양을 향해 갑옷을 단정히 고쳐 입고 4배를 올린 후 드디어 칼을 뽑아 목을 찔러 백상루 아래로 떨어졌다. 오랑캐 사람들도 서로 쳐다보고 놀라 말하기를 ‘충신열사의 시체는 일반 병사와 함께 둘 수 없다’ 하고 이내 백상루 앞에 묻어두고 표를 해 두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627년(인조 5) 1월21일, 그의 나이 52세였다.
전상의는 정치적 박해로 좌천됐지만, 후금의 군대와 끝까지 맞서 싸웠다. 그가 순국하자 그해 2월4일, 비변사는 증직 구휼하는 은전을 내려 격려 권장하라는 주청을 올린다. 곧바로 2월7일, 그에게 자헌대부 병조판서가 추증된다. 동년 7월26일, 그의 시신은 무등산 아래 평두산에 묻힌다.
국왕은 예조정랑 임련을 파견해 예장으로 장례지낸 후 사패지 30리를 하사해 그 충절을 기린다. 그 후 1682년(숙종 8) 안주 충민사에 배향되고, 1684년(숙종 10)에는 충신정려가 내려진다.
그에 대한 추증 및 배향은 당시 안주성 전투에 참여했던 남이흥, 김준 등과 비교해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다. 서인이었던 남이흥과 김준은 곧바로 안주 충민사에 주벽으로 모셔지지만, 인조반정의 반대편에 섰던 전상의는 주벽에서 밀려나고 있고, 시호마저 내려지지 않는다. 정충사와 포충사에 합사하라는 명이 내려지지만, 주벽의 후손들이 거부해 배향되지 못한다. 1849년(헌종 15)에서야 고려말 왜구 격퇴의 명장이었던 정지 장군을 배향하는 광주 경렬사에 추배된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985년 광주 무등산 자락에 전남도민의 혈세로 충민사가 건립돼 단독 배향된다. 그가 순절한 지 358년이 지난 후였다.
- 충민사에 얽힌 오해
충민사는 건립 이후 전두환과 관련된 오해에 시달린다. 전상의 장군과 광주 5·18 학살의 주범 전두환과는 ‘전씨’라는 성만 같을 뿐 본관이 달라 관련이 없었다. 전두환은 완산 전씨였고, 전상의는 천안 전씨였다. 그런데 건립 시점, 1985년이 문제였다. 1985년은 5·18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5년 후로, 무자비한 폭력으로 광주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에 대한 적의가 가득했다. 따라서 전두환과 같은 성씨를 가진 전상의를 기리는 사당 건립을, 광주인들은 곱게 볼 수 없었다.
특히, 충민사 건립에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공적비에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이름이 들어있어 충민사에 대한 미움은 더 심했다. 유족들은 시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공적비를 내리고 땅속에 묻는다.
전경환의 이름이 새겨진 공적비가 땅속에 묻힌 사연은 이랬다. 사당을 건립하고 유물관을 건립할 즈음, 전상의 장군의 유품이 서울 인사동 골동품 시장에 나왔고, 골동품 가게 주인은 당시 실세였던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에게 보낸다. 전상의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천안 전씨였고, 전경환은 완산 전씨였다. 전경환은 자기 가문과 상관이 없는 전상의의 유품을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하게 된다. 그리고 전상의를 기리는 충민사 안에 유물관이 만들어지자, 국립민속박물관은 기증자 전경환의 이름으로 유품의 일부를 충민사에 보낸다. 그래서 유품을 기증한 전경환의 이름이 들어간 공적비가 충민사에 세워지고, 땅에 묻히는 해프닝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후금에 맞서 안주성 백상루에서 순국한 전상의는 김덕령, 고경명과 함께 광주의 3충신으로 불린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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