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밖 걷는 사람이 새역사 쓰듯 … 기업 경영도 모험정신 필요"

정승환 전문기자(fanny@mk.co.kr) 2026. 4. 1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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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 前대우그룹 총괄회장
한국 산업화 1세대 경영자로
도전·실패 경험 회고록 펴내
"될 때까지 해보자" 집념으로
2년 걸리던 원유운반선 건조
대우조선에선 10개월로 단축
의대쏠림 지속땐 제조업 붕괴
이공계 우대로 인재 확보해야
윤영석 전 대우그룹 총괄회장이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방위·조선산업 발전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

윤영석 전 대우그룹 총괄회장(88)은 대한민국 산업화 1세대 경영자다. 한국이 기술도 자본도 없던 시절, 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 함께 전 세계를 누비며 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특히 대우중공업과 대우조선 최고경영자(CEO)로 재직하며 K제조업의 기반을 닦았다.

두 회사가 만들었던 장갑차, 항공, 조선, 철도차량, 엔진, 굴착기 등은 세계 최고 제품이 됐다. 중소협력사들은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대우는 없어졌지만 대우가 뿌린 씨앗들은 한국 경제의 기둥이 된 것이다.

윤 전 회장은 최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 경제가 싹을 틔우던 시절 불가능에 맞섰던 산업 역군들 이야기를 젊은이에게 꼭 전하고 싶다"면서 "기계공업의 씨앗을 뿌리고 도전·실패·성취를 거듭하며 이 나라 근간을 세운 사람들의 땀방울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달 초 회고록 '기적을 만들던 순간들, 역시 사람이었다'를 출간했다.

-회고록을 냈다. 집필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지금 누리는 풍요와 번영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다. 땀으로 퍼낸 우물 속 물과 같다. 나는 산업화 시절 그 우물을 판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980년대 대우중공업 기술자들은 무모하다고 할 만큼 건설 중장비와 엔진의 국산화에 도전했고 대우조선의 젊은 엔지니어들은 공정 혁신을 통해 고수익 선박을 만들어냈다. 회고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한국 산업화에 힘쓴 엔지니어들이다. 내가 일했던 대우중공업과 대우조선은 엔지니어들이 만들고 이끌었던 회사다."

-서울 상대 기계과 출신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제품 국산화에 힘쓰셨다.

"기술 자립이 하늘이 내게 맡긴 명령이라고 여겼다. 지게차, 굴착기, 철도차량, 공작기계 등을 국산화했다. 우수한 엔지니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젊은 이공계 인재들은 기업에서 사명감을 갖고 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의대 다음이 공대다. 마음이 무겁다. 의술로 사회에 봉사하는 길도 중요하지만 공대 졸업 후 기업에서 산업 발전에 이바지하는 삶은 큰 보람을 준다. 우리가 어떻게 제품을 개발하고 국산화해 세계적인 제조 강국이 됐는지 젊은이들이 알아줬으면 한다."

-1980년대 기술자는 어떻게 일했나.

"나와 함께 일했던 엔지니어들은 선진 기술 도면을 분해·분석했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 일에 몰두했다. 기술에 굶주린 그들의 가슴은 새 지식을 향한 갈망으로 달아 있었다. 머릿속은 새로운 원리를 터득하려는 집념으로 가득 찼다. 도면을 이해한 엔지니어들은 도면이 담은 원리를 우리 고유의 제품으로 구현해냈다. 대우중공업 엔지니어들은 새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능력 부족을 이유로 포기한 적이 없었다. 기술 국산화를 향한 엔지니어들의 도전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긴장되고 감동적인 드라마였다."

-엔지니어를 어떻게 육성했나.

"제조업은 우수 인재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인재를 외부에서 영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부 엔지니어들의 사기를 높이는 일에도 신경 썼다. 대우중공업 CEO 시절 엔지니어에게는 입사 후 2년간 반드시 현장 경험을 쌓도록 했고 2년 후 무조건 대리로 승급시키는 특혜를 줬다. 기술자를 우대해야 회사가 살기 때문이다. 그때 대우중공업에 붙은 별명이 '대한민국 기계사관학교'였다. 그 시절 대우중공업의 인재와 기술력은 한국 산업 발전을 이끈 주역이었다."

-대우중공업은 한국 방위산업의 씨앗을 뿌렸다. 어떻게 방산의 중요성을 인식했나.

"방산에서만큼은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일본은 무기 수출을 할 수 없었다. 전 세계에서 적과 대치하며 기계산업을 발판으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한국이 그렇다. 방산 제품을 국산화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며 일했다. 미군 장갑차 개보수 사업에 이어 국산 장갑차 개발에 성공했다. 대우중공업이 개발한 첫 국산 장갑차는 1984년 국군의 날에 시가행진 대열에 올랐다. 16대 모두 단 한 대의 고장도 없이 퍼레이드를 무사히 마쳤다. 밤새워 설계도를 그리면서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선 집념이 있었기에 한국형 장갑차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대우조선 CEO 시절 가장 기억에 남은 혁신은.

"1985년 초대형 원유 운반선(VLCC) 한 척을 건조하려면 24개월 이상 필요했다. 생산 공정을 혁신해 건조 기간을 9~10개월으로 단축했다. 혁신의 핵심은 연구부터 설계, 자재 공급, 생산 과정의 매뉴얼화였다. 모든 것은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해군 관련 사업을 개발하고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건조도 시작했다. 2년 반 동안 선박 제조 공정을 뿌리부터 바꾸고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조직으로 바꾸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이 대우조선을 세계 최고 수준 조선소로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CEO를 하면서 얻은 지혜가 있다면.

"역사는 지도 속에 나와 있는 안전하고 편안한 길을 따라 걷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역사는 지도 밖을 행군하는 용감한 사람들의 도전으로 새로 쓰여왔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모험적으로 새 길을 놓으려 했다. 그것은 나와 기업, 국가에 발전과 소득을 안겨줬고 소중한 성취감을 선사해줬다. 변화의 흐름을 자세히 파악하고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는 길로 가면 약속의 땅을 만날 수 있다."

△1938년생 △1958년 경기고 졸업 △1964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64년 한성실업 입사 △1968년 대우실업 입사 △1980년 대우중공업 사장 △1985년 대우조선 사장 △1990년 (주)대우 무역부문 사장 △1993년 대우중공업 부회장 △1995년 대우그룹 총괄회장 △1998년 한국중공업 사장 △2001년 두산중공업 부회장

[정승환 재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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