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권의 트렌드 인사이트] 여성의 생활 보조하는 남성 ‘히모’

2026. 4. 1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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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권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김인권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직업이 히모입니다.”

최근 일본의 예능 프로그램이나 인터뷰 기사에서 간간이 등장하는 이 대답은 가볍게 웃고 넘기기 어렵다. 히모는 원래 ‘끈’을 뜻하지만, 오래전부터 속어로는 여성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남성을 지칭해 왔다. 우리말로 굳이 한다면 ‘머슴’이랄까? 과거의 히모는 대체로 무책임과 기생의 이미지, 즉 사회적 실패자의 상징에 가까웠다.

그런 단어가 다시 호출되고 있다. 새 로운 현상이 등장했다기보다, 기존에 존재하던 관계를 설명하는 언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일부 남성들이 스스로를 히모라고 명명하고, 미디어 역시 이를 하나의 관계 방식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숫자로 확인되는 ‘증가’라기보다는 말할 수 있게 된 변화에 가깝다.

주목할 지점은 역할의 재해석이다. 오늘날 히모는 단순한 무직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일부 사례에서는 파트너의 생활을 보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일정 관리, 가사, 행정 처리, 반려동물 돌봄 등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일들이 포함된다. 특히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정서적 노동이다. 퇴근 후의 감정 정리, 스트레스 완충, 관계 유지의 안정장치 역할이다. 당사자들은 이를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고 설명한다. 기존에는 사적인 영역에 머물던 노동이 점차 언어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제미나이가 그린 일러스트.


이 지점에서 히모는 단순한 개인의 선택을 넘어 노동의 정의를 건드린다. 임금으로 환산되지 않지만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활동, 즉 케어와 감정 관리의 영역이 전면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에서 최근 재조명되는 ‘인비저블 워크’(invisible work) 논의와 맞닿아 있다. 결국 노동의 기준이 생산 중심에서 관계 유지로 확장되고 있다는 신호로도 읽힌다.

다만 이 관계는 제도화된 분업과는 다르다. 계약 부부나 명확한 가사 분담과 달리, 히모 관계에는 기준이 없다. 무엇이 기여이고 어디까지가 의무인지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 모호함은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갈등의 원인이 된다. 보이지 않는 노동은 평가받기 어렵고, 평가가 어려운 노동은 쉽게 무시되기 때문이다.

히모가 다시 소환된 배경에는 일본 사회의 구조 변화가 자리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장시간 노동과 안정적 고용을 전제로 했던 남성 생계 모델은 이미 균열이 뚜렷하다. 실질임금은 정체되고, ‘일하면 나아진다’는 기대는 약해졌다. 이런 환경에서 일부는 기존 경로를 벗어나 관계 안에서 역할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히모는 그 극단에 있는 사례로 읽힌다.

여성의 변화 역시 변수다. 고학력·전문직 여성의 증가는 소득 구조를 바꾸었고, 결혼을 생계 결합이 아닌 생활 선택으로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남성의 역할도 재정의된다. 부양자가 아니라 시간을 제공하는 파트너, 즉 노동의 형태가 금전에서 돌봄으로 이동하는 구조다. 이는 가정 내 역할뿐 아니라 노동시장 밖의 가치 평가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관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금전적 기여는 명확하지만, 시간과 감정의 기여는 측정하기 어렵다. 이 불균형은 갈등으로 이어지기 쉽다. 일본 드라마와 예능이 히모를 반복적으로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위로와 불안을 동시에 담아낼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히모는 일본만의 특이한 현상이라기보다 변화의 징후에 가깝다. 장시간 노동, 고용 불안, 맞벌이 구조, 감정 노동의 부상은 한국에서도 이미 진행 중이다. 이름은 다르지만, 관계 안에서 역할을 재설계하려는 움직임은 점차 관찰된다. 유럽의 동반자형 생계 분담, 미국의 ‘스테이 앳 홈 파트너’ 역시 같은 흐름 위에 있다.

히모는 직업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도 아니다. 계약서에는 적히지 않지만 분명 수행되고 있는 노동의 한 형태다. 이 단어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돈을 벌지 않는 기여는 어디까지 인정되는가? 그리고 관계를 유지하는 시간과 감정은 어떤 기준으로 평가되는가? 이 질문은 일본을 넘어, 이미 비슷한 경로에 들어선 사회 전체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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