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지사 조정구의 삶과 죽음

2026. 4. 1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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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지사(志士) 조정구(趙鼎九)는 일본 귀족 작위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했던 결연한 인물이었다.

망명과 은거를 오가며 청빈 속에 생을 마친 그의 삶은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와 결단을 응축해 보여준다.

일본 정부에서 주는 귀족 작위도 마다하고 세상을 떠돌다 장례비조차 마련하지 못해 빈곤 속에 생을 마감한 그의 마지막 길은 과연 어떻게 마무리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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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
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日 귀족작위 거부하고 자결 시도
장례 치를 돈도 없어 李왕가 지원


구한말 지사(志士) 조정구(趙鼎九)는 일본 귀족 작위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 했던 결연한 인물이었다. 망명과 은거를 오가며 청빈 속에 생을 마친 그의 삶은 나라 잃은 지식인의 고뇌와 결단을 응축해 보여준다.

“일찍이 일본 정부로부터 주는 남작(男爵)을 맡지 않고 뜻 같지 못한 세상을 떠나고자 자문(自刎·자기 목을 스스로 찌름)까지 하였으나 집안사람의 발견으로 마침내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스스로 처사(處士)가 되어 금강산(金剛山)과 중국 북경(北京) 등지로 표류하며 빛없는 세월을 보내던 조선 지사(志士) 조정구(67)씨는 30일 오후 4시경에 시내 원동 자저(自邸·자택)에서 한(恨) 많은 세상을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는데, 조씨의 파란중첩한 과거 일생의 약력(略歷)을 들으면 구 한국 시대 갑오년(甲午年·1894년) 이전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시작으로, 부제학(副提學), 대사성(大司成), 이조참의(吏曹參議), 규장각(奎章閣) 직제학(直提學),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지내고 갑오년 이후에 궁내협판(宮內協辦), 장례원경(掌禮院卿), 의정부(議政府) 찬성(贊成), 판돈령(判敦寧), 홍문학사(弘文學士), 기로소(耆老所) 비서장(秘書長) 등 혁혁한 벼슬을 역임해 오던 중, 천만뜻밖에 경술년(庚戌年·1910년) 합방을 보게 되어, 그해 10월에 귀족령에 의하여 주는 남작을 굳이 사양한 후 이와 같은 불합리한 세상에 몸을 부쳐 있기가 싫다 하여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자문을 하였으나 집사람들의 발견으로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5~6삭(朔) 동안 대한의원에서 치료를 받던 결과 근근 구구한 생명을 다시 이 세상에 부쳐 있게 되었었다. (중략) 작년 8월에 봉선사(奉先寺)에 가서 하룻밤을 지내다가 우연히 낙상(落傷)하여 척추골의 중상으로 마침내 병이 골수에 깊어져서 그와 같이 67세를 일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조씨의 유족으로는 아우 경구(經九)씨와 장남 남승(南升)과 3남 남복(南復), 조카 남직(南稷), 영손(令孫·손자) 형제, 영양(令孃) 형제 등이 있으나 장남은 북경에 망명하여 분상(奔喪·먼 곳에서 친상(親喪)의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감)도 못 할 경우에 있고 3남은 20여 년 전부터 미국에 가서 돌아올 기한이 역시 막연하다. 이곳에 있는 조씨의 유족들도 매우 군색(窘塞·딱하고 옹색하다)한 형편에 있으므로 조씨의 장례는 언제나 될는지 실로 답답한 정경에 빠져 있더라.” (1926년 4월 1일자 조선일보)

[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지사 조정구의 삶과 죽음


조정구 씨가 고국을 떠나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16년간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의 이야기는 앞서 동아일보에도 소개됐다. “과거에 겪던 모든 풍상은 멀리 꿈 밖으로 돌려보내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불경(佛經)이나 읽고 도(道)나 닦으려고 남 모르게 고요한 금강산 속으로 들어가기는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인 정사년(丁巳年·1917년) 10월이었으며 검은 옷을 입고 월파(月波)라는 당호(堂號)로 2년 동안의 숨은 생활을 계속하다가 기미년(己未年) 1월 24일에 고종 태황제가 승하하시자 남다른 관계를 가진 조씨는 급급히 행장을 수습하여 이슬이 가득 찬 산길을 밟아 하직하였던 한양을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국장이 끝난 후 조씨는 선산 묘하(墓下))인 경기도 양주 사릉(思陵)에서 며칠 동안을 있다가 남다른 생각을 가슴에 품었던지 조씨는 돌연히 집안사람도 모르게 한 장의 글발을 두고 어디인지 모르는 길을 떠나 국경의 경계망은 물샐 틈도 없건마는 그해 음력 2월 14일 밤에 용산 정거장에서 기차를 타고 멀리 북으로 향하였다. 몇 해 전 먼저 중국 하남성 개봉부(開封府)에 가 있는 조씨의 장자인 남승(南升)씨의 집에서 다시 두문(杜門·집 안에만 틀어박혀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다)의 생활을 하다가, 한 1년 후에 다시 남성 씨와 함께 북경에 옮겨와 역시 문을 닫고 불경 읽기로 6년 동안을 지내왔었다. 그리하자 작년 9월에 양주 사릉에 있는 조씨의 둘째 아들 남익(南益)씨가 어린 자녀를 앞에 두고 죽음의 나라로 돌아갔다. ”아! 어찌 외국의 땅에서 몸을 마치랴“하는 생각을 가진 조씨는 죽은 아들이 두고 간 자녀들의 거륵한 뜻이나 남겨주려고 지난 26일에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방금 시내 원동 조씨의 아우인 조경구 댁에 머무르는 중이다.” (1925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

일본 정부에서 주는 귀족 작위도 마다하고 세상을 떠돌다 장례비조차 마련하지 못해 빈곤 속에 생을 마감한 그의 마지막 길은 과연 어떻게 마무리 되었을까. 이는 1926년 4월 7일자 조선일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렴한 지사의 말로(末路)라 워낙 적빈(赤貧·매우 가난함)하여 장례비조차 구해 낼 길이 없다 함은 이미 보도하였거니와, 창덕궁과 운현궁에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각각 400원씩 하사하였는데 발인은 4월 7일 오전 2시라 하며 장지는 경기도 양주 사릉(思陵) 부근이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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