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없는 새 학기, 언제쯤 끝날까요?”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났습니다. 곧 있으면 중간고사도 있을 예정입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인 A 양은 아직 교과서를 다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교과서를 받지 못한 학생은 전교에서 A 양이 유일합니다.
A 양은 시각장애가 있습니다. A 양을 위한 점자 교과서는 개학하고 나서야 앞부분부터 분권 형태로, 제작이 되는 대로 한 권씩 지급됐습니다. 그 결과 1학기 수업 분량에 대한 교과서는 얼마 전 모두 받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수학 수업 시간, 문제 풀이는 교과서 맨 뒷부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뒷부분에 대한 점자 교과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의 특수교사가 부랴부랴 문제 파일을 받아 점자로 된 자료를 제공한 후에야 A 양은 문제를 풀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과목마다 여러 명의 선생님이 단원을 나눠 수업을 진행하거나, 진도를 뒷부분부터 나갈 때마다 A 양은 '교과서 없는 수업'을 해야만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예습'은 언감생심입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겁니다.
A 양/중학교 2학년
"하필 올해는 교육과정이 바뀌어서 이전 교과서로 공부할 수도 없어요. 문제집도 거의 없는 상태여서 문제를 풀 수도 없고요. 2학기에는 시작 전에 모든 책이 다 와 있으면 좋겠어요."
그나마 A 양은 사정이 나은 편에 속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특수교사가 최대한 조력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인데, 다른 곳은 상황이 이 정도로 여의치는 않습니다. A양도 교과서 외 나머지 교과 자료나 문제집에 대해서는 부모님이 나서 별도의 점자 자료로 제작해야만 했습니다.
■ '적시 보급' 의무화한다는데…'선언'에 그치는 법안
지난달 31일,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A 양의 사례와 같은 일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개정안은 점자 교과서를 포함, 장애인 학생과 교원을 위한 '교과용 도서'가 학기 시작 전 적시에 제작·보급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이를 위해 교과서 발행자는 요청이 있으면 제작을 위한 '디지털 파일'을 30일 이내에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법이 통과됐으니 문제가 해결될 거라 보면 오산입니다. 법안이 여러 가지 문제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안은 먼저 '적시에' 교과서를 보급하지 못하더라도 이를 제재할 수단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선언적 의미'에 그치고 있다는 겁니다.
다음으로 현재도 교과서 발행자는 요청을 받으면 빠르면 며칠 안에, 늦어도 30일 안에 파일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30일 이내 의무 제출' 조항이 담긴 건 새로운 효과가 발생하기는커녕, 발행자가 최대 30일까지 제출을 미룰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옵니다.
앞서 지난해 11월 이 문제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시각장애인 학생과 학부모, 관련 단체는 하나 같이 개정안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최근 성명을 내고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형식적인 조치에 머무른 것"이라고 규탄했습니다. 개정안이 진행 중인 헌법소원에 '악영향'을 미칠 거란 우려마저 나오고 있습니다.
■ 점자 교과서도 '교과서' 지위 부여해야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 걸까요? 관련 단체나 전문가들은 아주 간단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바로점자 교과서에도 '교과서' 지위를 부여하는 겁니다.
앞부분의 개정안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점자 교과서를 '교과용 도서'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일반 교과서와 다른 지위에 놓인 점자 교과서는 일반 교과서 발행이 끝난 후에야 점자로 변환 작업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여기에 최소한 2달 이상이 소요된다는 점입니다. 애초에 점자 교과서로의 활용을 전제하지 않은 교과서 내용을 그대로 점자로 변환하면 많은 오류가 발생합니다. 이 같은 시행착오를 바로잡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데, 학생과 학부모들은 심지어 그렇게 제작된 교과서조차 여러 오류를 담고 있어 학습에 지장을 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시각장애인 단체 등은 점자 교과서에도 '교과서' 지위를 부여해 검·인정 단계부터 곧바로 제작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되면 별도의 전환 시간이 걸리지 않고, 처음부터 '점자 교과서'에 맞는 형태로 제작에 들어가기 때문에 말 그대로 '적시'에 보급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관련 헌법소원을 이끄는 김진영 변호사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시각장애인인 김 변호사 역시 학창 시절 단 한 차례도 제때 교과서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김진영/변호사(동천장애인법센터, 법무법인 태평양)
"점자 교과서가 '교과서'에 포함이 되면 검정 절차 또는 인정 절차부터 애초에 이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접근 가능한 형태로 제작이 됩니다. 그러면 점자로 출력하는 시간 자체가 굉장히 짧아지거든요. 그래서 이 체계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건데 교육부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있죠."
■ "교과서 개발·채택부터 점자 교과서 제작 연계해야"
이런 점에서 해외 사례는 충분히 참고할 만합니다. 미국의 경우 '장애인교육법(IDEA)'을 통해 NIMAS라는 표준 파일 규격을 마련했습니다. 교과서의 개발과 채택 과정에서부터 장애인을 위한 교과서 제작이 연계되는 시스템입니다. 이를 통해 굳이 일반 교과서 발행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파일만 받으면 곧바로 점자 교과서를 제작할 수 있는 겁니다.
타이완도 장애 학생용 교과서를 별도 절차로 분리하지 않고, 일반 교과서와 동일한 시기와 경로로 조달하도록 해 적기 보급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출처 : 국회입법조사처 '시각장애인 학생·교원의 교과용 도서 접근권 보장을 위한 입법 과제)
미국은 여기에 더해 교과서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을 때에 대비한 일종의 '백업 시스템'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 자료를 담당하는 전문가로 활동하는 차문희 선생님은 "미국은 순회 교사가 장애 학생을 위한 교육 자료 제공을 책임지도록 제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런 방식입니다. 순회 교사가 먼저 각 학교로부터 학기의 수업 내용과 자료를 전달받습니다. A 양의 사례를 들어보면 순회 교사는 비록 점자 교과서가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라도 A 양의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미리 준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를 통해 어떠한 경우에도 장애 학생의 수업 진행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 "고용률 높이는 것보다 교육 장벽 해소가 먼저"…'보여주기' 그치지 않아야
헌법소원을 진행하고 있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한혜경 주임은 "정부가 의무 고용률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필요한 것은 교육의 장벽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개인의 역량과 상관없이 장애 때문에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구조라면 장애인 고용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고, 결국 교육 단계의 장벽을 먼저 바로잡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는 오늘(15일) 한국교과서협회, 주요 발행사와 함께 '시각장애 학생 학습권 보장 및 점자 교과서 적기 보급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었다고 밝혔습니다. 법 개정에 맞춰 발행사가 '3일' 이내에 디지털 파일을 제공해 점자로 변환하는 시간을 줄이겠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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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새배 기자 (newboat@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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