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자동차 문법으로 르노 필랑트를 온전히 해석하기 어려웠던 이유

강희수 2026. 4. 15.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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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강희수 기자] 우리나라에는 독특한 자동차 문법이 있다. 현대차 기아라는 수출입국의 자동차 브랜드가 만들어 놓은 문법이다. 수출 시장이 자동차 천국인 북미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보니 그 특징이 강해졌다. 이왕이면 크고 퍼포먼스가 뛰어난 차를 선호한다. 사용 빈도와 상관없이 가능한 많은 사양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첨단 기능을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크게 열려 있다. 

돌이켜 본다. 2022년 르노코리아가 ‘오로라 프로젝트’를 추진할 즈음이다. 그 해 7월, 당시 스테판 드블레즈 사장이 한국 기자들과 간담회 자리를 만들어 ‘오로라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5개년 계획을 설명했다.

드블레즈 사장은 이런 말을 했다. “2024년 출시를 목표로 볼보차의 CMA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중형 또는 준대형 하이브리드 SUV 개발을 시작했다. 한국 자동차 소비자들은 D(중형) 또는 E(준대형) 세그먼트 차량이 전체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큰 차를 선호한다. 우리가 개발하는 차도 그 세그먼트이다.”

르노그룹의 실세 엔지니어가 2022년 초 한국 사장에 부임해 시장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내린 결론이었다. 그랑 콜레오스와 필랑트를 탄생시킨 오로라 프로젝트는 그 때부터 한국의 르노코리아 중앙연구소와 부산공장을 D/E 세그먼트의 산실로 만들어 갔다.  

세그먼트 이야기는 4년 뒤 다시 조명됐다.

2026년 4월 14일, 르노코리아의 새로운 대표이사 니콜라 파리 사장이 한국 기자들 앞에서 르노코리아의 장기 로드맵을 발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한국 자동차 소비자들의 특징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파리 사장은 “한국 고객들은 최신 기술과 디자인 트렌트에 매우 민감하고 수준이 높다. 이 같은 특성들이 르노코리아로 하여금 프리미엄 사양, 최고 품질의 사양, 그리고 최신 기술을 갖춘 D/E 세그먼트의 허브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한 저력이다”고 말했다.

르노 그룹이 보는 르노코리아의 역할도 분명해졌다. 

지난 3월 발표된 르노그룹의 새로운 중장기 전략 ‘퓨처레디(futuREady) 플랜’에 따르면 르노코리아의 부산 공장은 유럽 외 글로벌 시장 성장을 위한 핵심 축이자 D/E 세그먼트의 전략적 허브(HUB)로 잡혀 있다. 유럽 내에서 전통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A와 B 세그먼트는 르노의 프랑스와 유럽 공장에서 담당한다. 부산공장은 향후 전기차 생산을 위한 스마트 제조 허브로도 발전시켜 나간다.

‘퓨처레디(futuREady) 플랜’대로 르노그룹 내 부산 공장은 중형 또는 준대형 세그먼트의 글로벌 허브가 됐다. 이 말은 곧 부산 공장에서 생산되는 자동차의 주 판매 타깃이 한국시장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르노그룹이 콕 집어 명시한 시장은 한국을 포함해 중남미와 중동이다. 이 시장은 상대적으로 D/E 세그먼트 선호도가 높다.

이런 배경을 듣고 나면 르노코리아 오로라 프로젝트2의 산물 ‘필랑트’가 한국적 자동차 문법을 얼핏얼핏 비켜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비켜간 자리는 르노가 결코 떨칠 수 없는 프랑스 감성이 메우고 있다.

르노코리아는 필랑트를 SUV가 아닌, ‘크로스오버’로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 감성으로 한국에서 만든다는 의미의 르노코리아 슬로건 “Born in France, Made in Korea”를 가장 잘 함축한 보통명사가 바로 ‘크로스오버’다. 한국적 자동차 문법을 따른 듯하면서도, 온전히 그렇게 하지 않은 자존심이 ‘크로스오버’를 탄생케 했다.

한국 시장만 고려했다면 필랑트는 크로스오버가 아닌 6~7인승 SUV가 돼 있었을 게다. 그러나 필랑트는 무리하게 3열 시트를 넣는 대신 유려한 실루엣을 택했다. 중남미와 중동에서는 한국의 기술로 탁마된, 프랑스 감성으로 승부수를 던져야 하기 때문이다. 

제원상 필랑트는 기아의 베스트셀링 SUV 쏘렌토 하이브리드보다 더 길다. 필랑트가 4915mm(휠베이스 2820mm)의 전장을 가졌지만, 쏘렌토는 4815mm(휠베이스 2815mm)다. 필랑트는 3열 시트 대신 여유로운 2열 공간을 택했다. 쏘렌토 하이브리드 보다 작은 배기량의 엔진(필랑트 1.5리터 가솔린 터보, 쏘렌토 1.6리터 가솔린 터보)을 지녔지만 하이브리드 E-Tech 기술과 크로스오버 디자인으로 배기량 열세를 극복했다.

필랑트의 내연기관은 최고출력이 144마력(쏘렌토 하이브리드 180마력)이지만 하이브리드 E-Tech 기술로 시스템 총출력을 250마력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필랑트의 하이브리드 E-Tech는 그랑 콜레오스와도 또 다르다. 필랑트와 같은 파워트레인을 사용하는 그랑 콜레오스는 내연기관 최고출력은 144마력으로 같지만 합산 최고출력은 242마력이다. 최대토크도 그랑 콜레오스가 23.5kg.m이지만 필랑트는 25.5kg.m로 높아졌다.

필랑트의 하이브리드 E-Tech 파워트레인은 100kW의 구동 모터 및 60kW의 시동 모터가 가솔린 1.5L 터보 직분사 엔진과 만나 250마력의 시스템 최고출력을 발휘한다. 르노 필랑트의 공인 연비는 복합 기준 15.1km/L이며, 1.64kWh의 대용량 리튬이온 배터리를 탑재해 도심 구간 운행 시 최대 75%까지 전기 모드로 주행이 가능하다.

르노코리아에서 필랑트 개발에 참여한 엔지니어는 지난 달 있었던 경주 시승행사에서 “그랑 콜레오스 구매자들의 피드백을 받았을 때, 출력이 다소 아쉽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필랑트 개발에서는 그 점을 보완했다”고 말했다.

수치상으로는 적은 차이이지만 운전자의 발끝에 와닿는 느낌의 차이는 크다. 필랑트가 그랑 콜레오스 보다 훨씬 큰 차임에도 불구하고 몸놀림은 한결같이 단정했다. 대중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웅변가이기 보다는 조곤조곤 핵심을 짚어내는 논리적인 토론가다.

내가 꽤 괜찮은 차를 운전하고 왔다는 자부심은 차에서 내렸을 때 더 강하게 다가온다. 실루엣이 시원시원하고 우아하다.

르노코리아는 이 디자인을 두고 “세단과 SUV의 특성을 고루 담아낸 독창적인 ‘크로스오버’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디자인이 탄생하게 된 과정에는 “한국과 프랑스의 르노 디자인 센터 간 긴밀한 협력이 있었다”고 했다. 한옥의 처마 끝에서 한국적인 선의 아름다움을 찾아냈던 동서양의 정서가 필랑트의 실루엣에서 일치한 듯하다.

차는 길지만 차고는 낮다. 후면으로 갈수록 차체는 점차 날렵해진다. 쿠페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낙차다. SUV의 실용성을 지녔지만 그 운동성은 세단에 가깝다.

실내에서는 첨단 테크 아이템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르노그룹은 전통적인 자동차 제조사이다. 엔지니어링에는 능하지만 디지털이나 IT 분야까지 선두에 있지는 않다. 르노그룹은 이 같은 약점을 여러 협력 업체와의 수평적 파트너십 결성으로 해결하려 한다. 엔지니어링으로 승부를 걸 때는 모든 기술을 다 갖고 있는 게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과 얼마나 더 유연하게 융합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프랑수와 프로보 르노그룹 회장이 밝힌 ‘퓨처레디(futuREady)’ 전략에도 이런 내용이 뚜렷하다. 최고 수준의 테크놀로지를 보유한 파트너사들과 윈윈(win-win) 연합 전선을 펼쳐 미래 혁신을 향한 동반성장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내용이 중장기 실행 계획의 골자로 자리잡혀 있다.

르노 필랑트의 실내에는 이미 그런 증거들이 수두룩하다.

첨단 커넥티비티 기술을 결합해 완성된 프리미엄 테크 라운지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티맵 인포테인먼트의 ‘에이닷 오토’가 든든한 운전의 동반자 구실을 해 주고 있다.

AI 기반 음성 어시스턴트 ‘에이닷 오토’는 운전자의 평소 주행 패턴을 분석해 목적지를 추천하고 차량 기능을 제어한다. 맞춤형 서비스가 가능해진 에이닷 오토는 LLM(대규모 언어 모델)을 기반으로 탑승객들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전화나 음악, 내비게이션과 멀티미디어, 공조 시스템, 창문 개폐 등 차량 기능 명령도 수행할 수 있다.

지능형 차량 매뉴얼 서비스인 ‘팁스(Tips)’도 AI 기반으로 운영된다. ‘팁스(Tips)’에는 OpenAI의 ChatGPT(챗지피티) 기반 생성형 AI 기술이 들어가 있다. 차량 사용 중 발생하는 다양한 궁금증을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된 통합 안내 서비스다. 검색어 중심 정보 탐색 방식과 달리, 대화 형식으로 정보 탐색을 이어갈 수 있어 자연스러운 정보 전달이 가능하다.

프랑수와 프로보 르노그룹 회장이 말한 ‘최고 수준의 테크놀로지를 보유한 파트너사’들이 필랑트 안에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다.

르노 필랑트는 개별소비세 인하 및 친환경차 세제 혜택 적용 기준으로 테크노 4331만9000원, 아이코닉 4696만 9000원, 에스프리 알핀 4971만 9000원이다. /100c@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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