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감독 “4·3 다루면 투자 어려워…다른 사람이 먼저 만들 줄 알았다” [인터뷰]
이름을 찾는 여정 속 4·3의 비극과 치유
“계속 영화하고 싶어…나는 행운아”
![[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5/ned/20260415150156111qomn.jpg)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첫째, 영화가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다. 둘째, 재미는 없는데 의미는 있다. 셋째, 이도 저도 아니다. 이 셋 중 하나만 골라봐요.”
80살의 노장 감독은 인터뷰 시작과 동시에 이어진 아주 잠깐의 정적도 놓치지 않았다. 경쾌한 목소리로 ‘깜짝’ 질문을 던진 그의 재치에 약간의 긴장이 공존했던 공기는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누군가가 그러더라고요. 영화가 진지하니까 재미있다는 말을 함부로 하기 어려울 거라고요.”
질문에 대한 답변과 의도까지 깔끔하게 매듭지은 그는 명쾌하게 남은 질문에 대한 답을 이어갔다. ‘현역 최고령’이라는 수식이 무색하게 만드는 뜨거운 열정과 영화에 대한 믿음이 감독 정지영의 한마디 한마디에 또렷하게 전해져왔다.
정지영 감독을 그의 신작 ‘내 이름은’의 개봉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만났다.
![영화 ‘내 이름은’ [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5/ned/20260415150156451vhrl.jpg)
영화 ‘내 이름은’은 1998년 봄, 촌스러운 이름이 부끄러운 18세 아들 ‘영옥’과 1949년 제주의 기억을 마주하게 된 어머니 ‘정순’의 궤적이 교차하는 미스터리 드라마다. 제주 4·3의 비극을 겪고 기억을 잃은 채 살아온 정순의 삶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치유 과정을 그린다. 주인공 정순 역은 염혜란이, 아들 영옥 역은 신예 신우빈이 연기했다.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 괜스레 ‘영옥’이란 이름이 떠올랐다는 ‘정순’. 9살 이전의 기억을 잃은 그의 눈앞에는 바람 부는 보리밭에서 친구와 뛰놀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문득문득 펼쳐진다. ‘영옥’은 대체 누구이고, 자꾸만 떠오르는 장면의 출처는 어디일까. 그리고 그가 잊고 있던 기억에는 어떤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는 것일까.
‘내 이름은’은 제주 4·3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주인공이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을 역사 속 비극을 되짚는 여정으로 이어낸다. 관객이 주인공의 여정을 함께하면서, 4·3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란 감독의 판단이었다.
“4·3 사건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고,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처음부터 4·3 사건을 영화로 만드는 건 어렵다는 판단이었어요. 그래서 4·3 사건을 찾아가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죠.”
영화는 4·3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 당선작이 원작이다. 정 감독은 시나리오의 연출 제안을 받고 처음에는 고사했다. ‘남부군’(1990)과 ‘남영동 1985’(2012) 등 전작에서 다뤘던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4·3 생존자가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간다’는 아이디어에 매료된 그는 2년간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정 감독은 “4·3은 벌써 다뤘어야 했던 이야기”라며 운을 뗐다.
![영화 ‘내 이름은’ [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5/ned/20260415150156705vtsu.jpg)
“제주도민들은 4·3을 모두 알고 있는데 우리 육지 사람들은 잘 몰라요. 교과서에도 한두 줄만 나오고 말죠. 그간 4·3 영화를 안 한 건 다른 사람이 할 줄 알았기 때문이에요. 물론 다른 사람들이 준비는 많이 했는데, 투자를 안 해주니 못한 거예요. 4·3 이야기를 돈 많은 투자자들이 선뜻 투자해주겠어요.”
하지만 해야 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펀딩이었다. 정 감독은 작품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함세웅 신부, 백낙청 교수, 조정래 작가, 현기영 작가 등이 참여한 제작추인위원회를 꾸렸다. 그렇게 펀딩을 시작한 영화는 텀블벅을 통해 한 달 만에 4억 원을 모았다. 펀딩에 참여한 1만여 명의 이들은 끝나지 않을 듯 이어지는 영화 엔딩 크레딧에 모두 담겼다.
“정지영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데 누가 돈을 선뜻 내겠어요. 그래서 30명 이상의 명망가에게 부탁해서 제작추인위원회를 만들었죠. 그분들 대부분이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들려는데 추진위원이 돼 달라’고 했을 때 바로 승낙을 해주셨어요. 그분들이 정지영이란 사람을 믿는구나, 그리고 이들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나더라고요. 앵벌이를 다니면서 하더라도 시작해야겠단 생각뿐이었어요.”
정 감독은 염혜란을 주인공 ‘정순’ 역으로 염두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그는 ‘소년들’(2023)에서 염혜란과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정 감독은 “잠시 같이 일을 해봤을 때 그 리얼하면서도 감칠맛 있는 연기에 반했다”면서 “마침 시나리오를 쓰면서 간접적으로 염 배우가 다음 작품도 같이 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볼 것도 없이 주인공으로 택했다”고 밝혔다.
‘내 이름은’은 정 감독의 작품 중 드물게 여성이 주인공이다. “여자 캐릭터를 그리는 건 어렵더라고요. 살면서 만난 와이프도 어려워요.” 정 감독은 ‘정순’의 캐릭터의 상당 부분을 염혜란의 연기에 맡겼다.
“이 영화는 제가 다 그린 것이 아니에요. 사실 염 배우가 그린 것이나 마찬가지죠. 물론 작품의 흐름은 나왔고, 캐릭터도 나와 있지만 세부적인 것은 제가 컨트롤하기 힘들더라고요. 처음에 염 배우가 이 작품을 보고 캐릭터를 어떻게 구현하면 되는지 묻길래, ‘선수가 그걸 나한테 왜 묻냐’고 답했죠.”
![영화 ‘내 이름은’ [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5/ned/20260415150156945vyqx.jpg)
영화 속 현재인 1998년에는 학교 폭력의 방관자가 된 ‘영옥’이 있다. 그리고 1949년에는 또 다른 폭력의 희생자이자 가해자이기도 한 ‘정순’이 있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의 서로 다른 폭력을 교차시키면서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폭력의 작동 방식을 조명한다. 4·3의 원인과 과정을, 폭력이 한 교내에 뿌리내리는 과정으로 대신한 것도 감독의 의도다.
“집단적 폭력은 어떤 새로운 강자가 질서를 재편하고자 하고, 그 갈등이 이간질과 폭력을 야기하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어요. 영화는 4·3이 어떤 과정으로 일어나는지 보여주지는 않지만, 학교 폭력을 통해 공통된 폭력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영화 ‘내 이름은’은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과 제28회 우디네극동영화제 메인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되며 해외 관객을 먼저 만났다. 정 감독은 “돈을 펑펑 써서 만든 영화가 아니라서 부담감이 컸는데, 그 이상으로 과분한 평가를 받은 느낌”이라고 했다.
“유럽은 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그리스는 1940년대 말 4·3과 비슷한 비극을 겪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아이들이 죽어가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 전쟁을 못 막고 있죠. 그런 전쟁의 후유증에 대한 공감대가, 한국의 사건이지만 해외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요.”
감독 정지영의 필모그래피에는 ‘이념’과 ‘갈등’의 흔적이 공존한다. 날카로운 사회적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감독의 과감한 접근이 정쟁의 소재가 된 적도 많았다. 정 감독은 자신의 작품을 “정치적으로 껄끄러운 작품”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연출을 하는 데 있어) 주의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과감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독은 자칫하면 확증편향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어요.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해야 해요. 본인이 어떤 역사관을 세웠으면, 그것에 대해서 어떠한 질문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죠. (실화 기반의 작품을 주로 하는 것은) 용기라기보다는 제가 감독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남들 하는 거 또 하고 싶어 하는 감독은 없으니까요.”
![[렛츠필름·아우라픽처스 제공]](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4/15/ned/20260415150157239ajun.jpg)
고령의 감독은 지침이 없다. 정 감독은 ‘내 이름은’을 이을 차기작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는 다음 작품이 고예산의 ‘대작’이 될 것이란 귀띔과 함께 “차기작엔 진짜 큰 투자자들이 나서줘야 한다. 앵벌이론 안 된다”며 웃었다.
“감독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그런데 영화감독은 관객이 불러줘야 계속할 수 있고, 게다가 제가 나이가 있으니 그것이 문제죠. 이렇게 빨리 변화하는 시대에 제가 던지는 주제가 여전히 유효하겠냔 고민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잘 엮어서 계속 영화를 하고 있으니, 저는 정말 행운아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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