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에 누가 명품을? 한국인이 삽니다 [이슈크래커]

전쟁 중에 도대체 누가 명품을 살까요?
중동에서는 사실상 소비가 멈췄습니다. 두바이 등 주요 쇼핑 거점에서는 매출이 최대 70% 급감했고, 방문객도 절반 가까이 줄었다고 하죠.
중동 전쟁은 명품 업계도 피해갈 수 없는 변수였습니다. 13일(현지시간) 명품 1위 기업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발표한 올해 1분기 매출(191억유로) 역시 시장 추정치(191억9500만유로)보다는 못 미치는 수준이었죠. LVMH 주가도 올해 들어 약 25% 하락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세실 카바니스 LVMH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실적 부진 속에서도 ‘한국’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고 언급한 겁니다. 실제로 카바니스 CFO는 “LVMH 매출이 중동을 비롯한 유럽·일본 시장에서 주춤했지만 한국에선 오히려 증가했다”고 말했습니다.
국내 법인 실적을 보면 이 흐름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루이비통·샤넬·에르메스 등 3대 명품 브랜드 한국 법인이 모두 지난해 역대 최대 실적을 거뒀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루이비통코리아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6.1% 늘어난 1조8543억원, 영업이익은 35.1% 늘어난 5256억원을 기록했습니다. 같은 기간 샤넬코리아 매출은 처음으로 2조원을 돌파했고, 에르메스코리아 매출은 최초로 1조원을 넘어섰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세계 경제는 흔들리는데 왜 한국만 명품을 사는 걸까요?단순히 ‘한국인이 명품을 좋아해서’일까요?

지금 한국은 단순히 명품을 소비하는 국가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한국 시장은 가격과 매장 전략, 제품 반응을 시험하는 시장에 더 가깝습니다. 이번에 카바니스 CFO 역시 직접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LV 더 플레이스 서울, 신세계 더 리저브’를 언급하며 한국을 ‘중요한 시장’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죠.
또한, 2023년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한국인의 1인당 개인 명품 소비가 325달러로 세계 최고 수준으로 집계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이 단순한 판매처가 아니라, 명품 브랜드 입장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핵심 소비국’으로 올라섰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은 어떻게 ‘명품 사회’가 되었나

위기 속에서 피어난 한국인의 ‘명품 사랑’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 바 있죠. 실제로 2010년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한국을 두고 ‘글로벌 금융위기를 놀라울 정도로 잘 견뎌낸 국가’라고 평가했습니다. 맥킨지는 이에 대한 근거로 일본과 유럽, 미국에서는 명품 소비가 정체되거나 감소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명품 소비가 활발하게 이뤄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2008년과 2009년 사이 한국 명품 소비의 주요 유통 채널인 백화점 매출은 16.7% 증가했습니다. 이는 주요 시장 가운데 중국 다음으로 가장 빠른 성장 속도였죠. 맥킨지는 이렇듯 한국에서 명품 시장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요인으로는 백화점 중심의 유통과 프리미엄 아울렛의 성장, 그리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입문형 제품을 통한 소비층 확대를 짚었습니다. 한때 일부 상류층의 상징이던 명품이 백화점, 아울렛, 온라인 접점을 거치며 ‘접근 가능한 소비’로 넓어졌고, 브랜드들은 입문형 제품으로 더 젊고 넓은 수요를 끌어들이게 된 거죠.
이러한 변화는 명품의 성격 자체도 바꿔놨습니다. 2025년 글로벌 컨설팅업체 베인앤컴퍼니는 명품 시장이 ‘과시적 소비’에서 ‘경험 중심 소비’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단순히 비싼 제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미식·웰니스 등 경험을 통해 만족을 얻는 방향으로 소비가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여기서 한 가지 더 나아갑니다. ‘경험 중심 소비’로의 전환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명품 가격이 오르면서 ‘오늘이 가장 싸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주요 명품 브랜드들은 반복적인 가격 인상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견조한 수요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매출이 증가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명품을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가격 인상 이전에 미리 구매하는 ‘반(半)자산’으로 보는 시각도 나옵니다. 실제로 ‘명품 재테크’라는 기이한 단어도 생길 정도죠. 어쨌거나 가격 인상 속에서도 명품 수요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명품은 웃고, 내수는 멈췄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명품은 웃고 있지만, 한국 내수 전반이 같은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2월 국가데이터가 발표한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가구당 월평균 실질 소비지출은 252만445원으로 전년보다 1만1065원 줄었다고 하죠. 실질 소비지출은 2021년부터 2024년까지 4년 연속 증가세를 이어왔으나, 지난해 처음으로 꺾였습니다. 이는 코로나 사태로 2.8% 감소했던 2020년 이후 처음이기도 합니다.
계층별로 보면 간극은 더 분명합니다. 2025년 1분기 기준 소득 하위 20%인 1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14만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5% 감소한 반면, 상위 20%인 5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188만원으로 5.6% 증가했습니다.
이런 소비 양극화가 무서운 이유는, 지표를 착시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백화점 명품 매장 앞 오픈런은 여전하지만, 실제로는 다수 가계가 물가와 금리 부담 속에 지갑을 닫고 있습니다. 실제로 산업통상자원부의 2026년 1월 주요 유통업체 매출 동향을 보면 온라인은 성장세를 유지했지만 대형마트와 기업형슈퍼마켓(SSM)은 전년 대비 각각 18.8%, 4.4% 감소했습니다. 소비가 경제 전반에 고르게 퍼지지 못하고 일부 채널과 일부 계층에만 남아 있으면, 내수의 체감 회복은 계속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명품 호황은 단순히 ‘경기와 무관한 부자들의 소비’ 정도로 축소해서 볼 일이 아닙니다. 한국은 분명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성장 동력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한국 내수의 건강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잘 사서 명품이 잘 팔리는 사회가 아니라, 일부는 더 비싼 가방을 사는 반면 다른 일부는 실제 소비를 줄이는 사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품 시장에서는 한국이 ‘핵심 소비국’이 됐지만, 그 소비의 온기가 동네 상권과 일반 내수까지 퍼지고 있는지는 전혀 다른 질문입니다.
결국 ‘경기는 불황인데 명품은 잘 팔린다’는 문장은 한국 경제의 강함을 보여주는 말이 아니라, 어쩌면 한국 사회의 균열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문장일지도 모릅니다. 세계 명품 기업들이 “한국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동안, 한국 내수는 정말 웃고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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