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3조 잭팟 터진 중국…"우리가 원조인데" 한국 기업들 탄식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2009년 12월 17일은 한국과 중국이 차세대 성장동력을 선점하느냐를 놓고 운명이 뒤바뀐 날이다. 당시 중국의 부주석이던 시진핑은 청와대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저탄소 녹색성장 전략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겠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이듬해부터 배터리와 전기차, 태양광 등 전기화 기술들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시진핑은 2012년 국가주석에 오른 뒤엔 ‘생태문명’과 ‘녹색발전’을 중국의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의 핵심 축으로 공식화했다.
시 주석의 예방 이후 17년이 지났다. 중국은 한국에서 배우겠다던 녹색성장 전략을 실제 돈이 되는 사업으로 현실화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나라의 설계를 받아 제품을 대량 생산하며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던 중국은, 고부가가치 전기화 기술을 직접 설계하고 내다파는 ‘생산자형 전기국가’가 됐다.
지난해 중국의 청정 전기화 기술 부문의 경제 기여도는 15조4000억위안(약 3333조원)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역대 최대 규모다. 국가로 가정할 경우 브라질이나 캐나다를 제치고 세계 8위의 경제 대국과 맞먹는다.
중국의 신산업 굴기가 단순히 보조금과 거대 내수 덕분이라고만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의 ‘예측 가능성’에 주목한다. 중국은 2030년 탄소정점, 2060년 탄소중립이라는 명확한 과녁을 찍어놓고 15년 단위 중장기 계획을 5년마다 보완하며 100년 앞을 내다보고 있다.
중국에 진출한 한 기업 관계자는 “중국은 중앙정부의 모호한 가이드라인이 기업들에 유연한 대응 공간을 열어주고, 지방정부와 국영기업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산업 육성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리 중심의 에너지 정책도 돋보인다. 중국은 공격적인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설정이나 탈석탄동맹 가입 등으로 기후 선진국이 되는 ‘생색내기’보다 청정 기술의 생산자가 되는 ‘실익’을 택했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높이면서도 지난해 석탄 생산량 역시 역대 최고치(48억3000만t)로 늘리는 이중 전략을 구사한 게 대표적이다. 대신 석탄을 무작정 태우는 게 아니라 녹색화·효율화에 집중하고 있다. 작년 9월 한 중국 국영기업은 자체 기술력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탄소포집(CCUS) 설비를 가동하기 시작했고, 앞으로 연간 150만t의 탄소를 흡수할 예정이다.
중국에 ‘녹색성장’의 씨앗을 뿌려준 한국의 성적표는 초라하다. 이명박 정부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탈원전과 탈태양광이라는 이념 전쟁에 매몰됐다. 그 사이 배터리, 태양광 등에서 확보했던 기술 우위도 미·중 갈등과 중국의 저가 공세 속에서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정책의 일관성이 사라지자 화석연료의 ‘질서 있는 퇴장’도 엉망이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해안 민자 석탄발전이다. 정부는 2011년 대정전 이후 전력 수급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석탄발전소를 대거 건설했다. 그러나 정부가 석탄발전 폐지 시점을 2050년에서 2040년으로 앞당기면서, 앞으로 가동 기간이 대폭 줄어들었다.
현재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송전망 부족으로 동해안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지 못해 발전량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인근 수요처에 직접 판매하는 전력직접구매(PPA) 제도가 추진됐지만, 정권 교체 이후 고시 개정이 2년째 지연되며 사실상 막힌 상태다. 민간 투자자 입장에서는 “정부 말을 믿고 투자했다가 정책이 바뀌면 손실을 떠안는다”는 경험만 남게 됐다.
화석연료의 질서있는 퇴장은 새로운 기술 개발과 시장 창출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존 화력발전기에 암모니아나 수소를 섞어 태우는 혼소 기술을 적용해 탄소 배출을 단계적으로 줄여나가다가 100% 전소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부가 이 징검다리를 스스로 끊고 있다는 점이다. 수소발전입찰시장(전력 판매 시장)과 용량시장(설비 유지 수익 보장) 등의 개설이 연달아 보류된 게 대표적이다. 수소·암모니아가 화석연료를 연명시키는 기술이라는 이유다. “수소 기술에 투자해도 시장이 없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지면서 기업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다.
결국 기업은 투자를 멈추고, 기술 개발은 지연되며, 기존 화력발전은 전환 로드맵 없이 연명하는 구조가 돼버렸다. 그 사이 일본과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잡았던 석탄·암모니아 혼소 기술은 정부의 지원 중단으로 사장될 위기에 놓였다.
탈탄소 녹색전환은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산업 경쟁이다. 정책이 흔들리는 순간 기업은 움직이지 않고, 기업이 멈추면 기술도 사라진다. 17년 전 한국을 배우겠다고 했던 중국이 지금 앞서 있는 이유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정책 하나였다. 전기국가 패권전쟁의 승패는 기술이 아니라 정책이 가른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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