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좋아진 건 부산오픈인데, 작아진 건 한국이었다…전멸이 더 아픈 이유

김종석 기자 2026. 4. 1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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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P 250을 바라보는 부산오픈…운영은 올라갔고, 한국 성적은 23년 역사상 가장 초라했다.
-올해 필드가 유독 괴물이었나…강한 대회였지만, 한국이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데이비스컵 연승에 부풀었던 기대…“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것 아니냐?”라는 자괴감이 남았다.
한국 테니스의 에이스 권순우도 부산오픈 1회전 문턱을 넘지 못했다. 부산오픈 제공

"부끄럽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국가대표 출신의 한 유명 지도자는 한숨부터 내쉬었습니다. 부산오픈 챌린저에서 드러난 한국 테니스의 민낯을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올해 부산오픈의 풍경은 묘하게 엇갈렸습니다. 대회는 분명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한국 남자테니스의 성적은 오히려 더 초라해졌습니다. 그래서 한국 선수 전원이 본선 1회전 문턱을 넘지 못한 이번 전멸은 단순한 패배 이상의 의미로 남습니다. 부산오픈이라는 무대는 앞으로 갔는데, 정작 그 무대를 채워야 할 한국 선수들의 경쟁력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올해 부산오픈은 운영 면에서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부산에 공장을 둔 르노코리아가 타이틀 스폰서를 맡으면서 대회 위상이 한층 올라갔습니다. 선수 식당 동선 정비와 외부 케이터링, 공항 픽업, 4성급 공식 호텔 변경, 무료 세탁 서비스, 공식 볼 교체, LED 전광판 설치, 유료 티켓과 온 코트석 신설까지, 대회 전반의 완성도를 눈에 띄게 끌어올렸습니다. 부산오픈 조직위는 ATP 250 수준 업그레이드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고, ATP 슈퍼바이저 역시 과거 지적 사항이 반영된 점에 만족감을 나타냈습니다. 무대만 놓고 보면 이제는 "국내 대회"보다 "국제 무대의 기준에 더 가까워진 대회"라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

최근 국내 대회에서 두 차례 우승한 정윤성도 부산오픈 2회전 진출에 실패했다. 부산오픈 제공. 

그런데 코트 안의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올해 부산오픈은 2003년 대회 시작 이후 처음으로 한국 선수들이 단식 2회전에 단 한 명도 오르지 못한 해가 됐습니다. 예선에 8명이 나섰지만 모두 첫 경기에서 탈락했고, 와일드카드를 받은 권순우, 박의성, 정윤성도 본선 1회전에서 모두 멈췄습니다. 이번 부산오픈은 단순한 부진이 아니라 한국 테니스 역사에 따로 기록될 만한 실패로 남게 됐습니다. 

  물론 반론은 가능합니다. 올해 부산오픈 출전 선수들의 수준이 예전보다 높았던 것 아니냐는 시선입니다. 애덤 월턴, 쇼 시마부쿠로, 콜먼 웡 등 상위 시드만 봐도 만만한 얼굴은 아니었습니다. 챌린저 상위 등급답게 한국 선수들에게 결코 쉬운 대회가 아니었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올해 필드가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역대급 괴물 필드라서 어쩔 수 없었다"라고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과거 부산오픈도 80~110위권 선수들이 상위 시드를 차지한 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상위 시드 랭킹 밀도만 놓고 보면 이전에도 충분히 빡빡한 대회는 있었습니다. 올해 상대가 셌던 것은 맞지만, 올해만 특별히 감당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번 결과를 더 아프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전 같으면 "대진이 세도 한 명쯤은 버틴다"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홈 관중의 응원을 받고, 익숙한 환경 속에서, 한 경기쯤은 뒤집어 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그 완충 장치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선도, 본선도, 와일드카드도 모두 첫판에서 멈췄습니다. 이건 한두 선수의 컨디션 난조라기보다 선수층 전체의 문제로 읽히는 결과입니다. 상대가 강했던 대회라기보다, 한국 남자테니스가 그 강도를 견뎌낼 바탕을 보여주지 못한 대회였습니다.

경기를 지켜본 뜻있는 테니스 코치들은 "한국 선수들의 볼 스피드가 세계 테니스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파워와 템포 역시 마찬가지"라고 입을 모읍니다. 최근 국내 대회에서 상승세를 보이던 선수들조차 부산에서는 그 흐름을 국제 무대로 연결하지 못했습니다. 국내에서 통하는 경기와 챌린저 상위 레벨에서 통하는 경기 사이에 아직 분명한 간극이 있다는 뜻입니다.

노갑택 대한테니스협회 부회장은 "한국 선수층이 너무 얇은 반면 대회 자체가 옛날보다는 수준이 높아져 실력 차이를 분명히 드러냈다. 세계 랭킹 100위에서 200위권에 있는 선수들과 경쟁할 만한 한국 선수로는 권순우, 홍성찬, 정현 정도가 있지만 군복무와 부상 등으로 계속적으로 게임을 뛸 수 없는 것도 경기력에 영향을 줬다"라고 말했습니다. 노 부회장은 또 "여러 가지 이유가 많겠지만 챌린저 선수들부터 많은 인원을 출전할 수 있도록 저변이 확대돼야 한다. 주니어에서 좀 뛰어난 선수들은 빨리 해외경험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가능성 보이는 선수들은 좀 빠르게 프로 전향을 해서 어릴 때부터 차곡차곡 실력을 쌓는 게 중요하다"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더 허탈한 건 얼마 전 데이비스컵에서 느꼈던 희망의 온도입니다. 한국은 카자흐스탄을 넘고, 아르헨티나까지 잡아내며 다시 큰 무대를 바라보는 듯했습니다. 비록 상대 팀이 최상 멤버는 아니었더라도 "한국 남자테니스가 다시 올라가는 것 아닌가?" 하는 기대가 살아난 것도 사실입니다. 파이널 8강 진출의 꿈이 아주 허황한 얘기만은 아닌 것처럼 들리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부산오픈은 냉정했습니다. 홈에서 열린 챌린저 무대에서 한국 선수들이 단식 1승조차 건지지 못하는 장면은, 데이비스컵의 뜨거운 승리가 곧바로 한국 남자테니스 전체의 체급 상승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을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자꾸 이런 자괴감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카자흐스탄전과 아르헨티나전의 감격은 분명 값졌습니다. 하지만 그 승리가 곧바로 선수층의 두께, 국제 경쟁력의 안정성, 세대 전체의 반등까지 의미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006년 부산오픈 우승자 이형택. 테니스코리아

더 뼈아픈 건 따로 있습니다. 부산오픈은 원래 운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온 대회였습니다. 2005년에는 삼성증권배 국제 남자대회와 함께 국제테니스연맹과 ATP가 공동 선정한 '올해의 챌린저 대회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순수 동호인 주도로 시작해 국제적 평가를 받아온 대회라는 점에서 부산오픈은 늘 자부심의 무대였습니다. 과거 이형택 정현 등이 부산오픈 우승 트로피를 안으며 운영과 성적의 두 토끼를 모두 잡는 성과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국제 기준에 맞춰 성장해 온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의 성적은 오히려 역사상 가장 초라한 지점까지 밀렸습니다.

  이번 부산오픈 참패의 원인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상대가 아주 강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상대의 강함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한국 남자테니스가 이제 홈에서 열리는 챌린저 상위급 무대에서도 단식 1승을 당연하게 기대하기 어려운 단계에 와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전멸은 이변이 아니라 신호에 가깝습니다. 

  부산오픈이 좋아진 만큼, 한국 테니스의 숙제도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주니어 육성과 국제 경쟁력의 조기 체화가 살길이라는 사실도 한층 분명해졌습니다. 그나마 최근 10대 남녀 유망주들이 대한테니스협회의 전폭적인 투자에 힘입어 국제 무대 경험을 충분히 쌓고 있는 대목은 한 줄기 희망으로 보입니다. 

한국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팬. 사진제공/부산오픈

김종석 채널A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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