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내고 모두와 함께 걸은, 서명숙이라는 공공재

피울 담배는 다 피웠다. 마실 술은 다 마셨다. 입도 거칠었다. 하고 싶은 욕은 다 하고 살았다. 대학 때는 하고 싶은 학생운동 다 했고 기자가 되어서는 쓰고 싶은 기사 다 썼다. 올레길을 내고 걷고 싶은 길도 다 걸었다. 그래서 여한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만 더 사셨으면 좋았을 것 같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으셨는데.
고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두 가지 면에서 인생 선배였다. 저널리즘 영역에서 선배 기자로 한 번, 투어리즘 영역에서 선배 여행가로 또 한 번. 앞 30년은 기자로, 뒤 20년은 여행가로 살았던 그는 두 영역 모두에서 넘볼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시사 주간지 첫 여성 편집장을 역임한 그는 제주올레라는 한국 관광사의 빛나는 성취를 일궈냈다.
저널리스트로서 서명숙은 1976년 〈고대신문〉에서 학보사 기자 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 원(原) 〈시사저널〉 편집장을 거쳐 2006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 동안을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IMF 외환위기 때는 부도난 회사에 끝까지 남아 기어이 매체를 살려내기도 했다.
기자 시절 대부분을 서 선배는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이른바 ‘삼김 시대’로 불린 그 시기는 정치부 기자가 ‘불가근불가원’이라는 저널리즘 원칙을 고수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때 기른 노련한 정치 감각은 나중에 제주올레가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시사 주간지라는 뉴스의 컨베이어벨트에서 그녀는 거친 조련사였다. 그녀가 데스크일 때 원고를 독촉하고 타박하면서 쓰던 표현들은 대략 이런 식이었다. “〈고요한 돈강〉 쓰냐? 내가 지금 노벨문학상 심사하냐?” “머리는 몸 위에 보기 좋으라고 얹고 다니냐?” 지금 시대라면 ‘데스크 갑질’이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할 만큼 거칠게 원고를 채근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서 선배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 거칠게 채찍질하는 선배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 했던 서 선배는 지하철역에서 회사 앞까지 200m 남짓한 그 짧은 거리도 택시를 타곤 했다.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늘 가정보다 회사가 우선이었다. ‘서명숙상회’를 접고 서울에 올라온 친정어머니의 도움 덕분에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런 서 선배였기에 산티아고 순례길 한 번 걷고 와서 걷기와 느림 예찬론을 펼 때 후배들은 사실 100% 믿지 못했다. 여행자의 감상에 기자 특유의 초를 좀 친 것으로 생각하고 곧 예전의 성격 급한 서 선배로 돌아갈 것이라 내다봤다. 사람은 잘 안 바뀌고 그중 서 선배는 더 안 바뀔 사람이었으니까. 타고난 워커홀릭의 짧은 외도 정도로 생각했다.
산티아고에서 발견한 고향의 옛길
그런데 바뀌었다. 그것도 완벽하게 바뀌었다. 기자 시절 서울에서 본 서 선배 얼굴과 제주올레를 걸을 때 서 선배의 얼굴은 완전히 달랐다. 거친 저널리즘의 전장에서 이른바 ‘명예 남성’으로 살 때와 고향의 들길을 걸을 때 표정은 같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올레길을 걸을 때의 서 선배는 영락없는 소녀였다.
내 기억에 서 선배에게 걷기의 로망을 불어넣은 사람은 시인이기도 한 이문재 선배(현 〈시사IN〉 편집위원)였다. 그 무렵 이 선배는 각종 걷기 예찬 서적을 원(原) 〈시사저널〉에 소개하곤 했다. 아직 젊었던 나는 한가한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번아웃된 서 선배는 느림의 미학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사실 서명숙 선배는 걷기와 가장 안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앞서 얘기한 200m 출근길 택시 탑승처럼, 서 선배에게 걷기란 각종 운송 수단이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이용하는 이동 수단 정도였다. 그렇게 걷기와 인연이 없던 서 선배가 올레길을 만들게 된 데에는 2006년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 여행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 보통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는데, 서 선배는 특이한 것을 재발견했다. 바로 고향 제주의 옛길이다. 어릴 적 걸었던 제주의 들길과 바닷길, 숲길이 산티아고 순례길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순례길에서 만난 영국인 친구 잔느 캐서린 헤니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각자의 길을 만들자’라고 한 약속도 큰 영향을 줬다. 서 선배는 돌아와서 바로 올레길 개척을 시작했다.
2007년 첫 코스를 낸 제주올레는 제주 관광의 역사를 다시 썼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일반인의 해외여행이 본격화하면서 제주는 외면받기 시작했다. “제주도 갈 돈으로 동남아 간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던 시절이었다. 서 선배는 제주올레를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주를 재발견하게 해주었다. 유명 관광지라는 건더기가 아니라 소박한 시골길의 국물 맛으로 사람들을 다시 제주에 불러들였다.

그렇게 조성한 올레길 27코스 437㎞는 대한민국 산업화 세대에게 은퇴 후 훌륭한 숙제가 되어주었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그들에게 은퇴 후 성취할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올레는 매력적인 답을 제시해주었다. 올레길 완주는 길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은퇴 후 성취감도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숙제였다.
기자를 그만두고 여행클럽을 시작하면서 올레꾼들의 제주올레에 대한 충성도를 보고 클럽 모델을 수정했다. 매년 올레축제에서 수천 명의 올레꾼이 보여주는 올레에 대한 애정과 의리가 부러웠다. 올레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굳건한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변함없는 지지가 컸다. 처음 여행클럽을 구축할 때 동년배인 2차 베이비붐 세대를 대상으로 하려 했는데, 올레꾼들을 보고 1차 베이비붐 세대로 탄착점을 높였다.
괸당(권당) 문화가 있는 제주도에서 정치적 외풍에 제주올레가 휘둘리지 않도록 서 선배는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베테랑 언론인으로서 이슈에 대해 발언하고 싶은 충동이 컸지만 제주올레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 참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은 이슈에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돌이켜보면 여러 번 안 참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그녀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올레를 활성화한 그녀에게 전 제주 차원에서 ‘까방권’이 주어진 것 같았다.
불의만 있고 분노가 없는 세상을 참지 못하는 그녀의 성격은 〈시사IN〉 창간을 돕기도 했다. 삼성 기사 삭제 사건에 항의해 〈시사저널〉 기자들이 파업할 때 〈오마이뉴스〉에 이를 고발하는 기고문을 쓰고 〈시사저널〉 사측에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이후 〈시사저널〉 기자들이 집단 사표를 쓰고 〈시사IN〉을 창간할 때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제주올레는 국내 트레킹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길이지만 또 한편 가장 개발되지 않은 길이기도 하다. 길을 내는 방식이 아니라 찾는 방식으로 개발해서 인위적인 것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8코스 갯깍주상절리대 아래 해안길은 해병대 제9여단 장병들이 손으로 바위를 옮겨가며 낸 길이라 ‘해병대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낙석 위험 때문에 현재는 폐쇄됐다).
국내에서 본격적인 트레킹 문화가 시작된 곳은 지리산 둘레길(사단법인 숲길)이지만 이를 꽃피운 곳은 제주올레였다. 이제 한국은 트레일 선진국이라 할 만큼 다양한 코스를 갖추었다. 동해안의 해파랑길, 남해안의 남파랑길, 서해안의 서해랑길 그리고 DMZ 평화의 길까지 전 국토가 ‘코리아 둘레길’로 연결되었다. 이 걷기 문화의 최선봉에 제주올레가 있었다.
너른 품으로, 균형 잡힌 삶 남기다
제주올레는 해외로도 수출되었다. 일본에 규슈 올레와 미야기 올레가, 몽골에는 몽골 올레가 제주올레와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트레킹 코스를 만들었다. 규슈 올레 개장식에 참가한 제주올레 한 스태프는 “예전에 이곳에 감귤 농업 연수를 왔을 때는 도둑 취급을 받았다. 그랬던 이곳에 우리 길 문화를 가르치러 오니 감개무량하다”라고 말했다.

몽골에는 사단법인 제주올레 주도로 복드항산 코스·칭기즈칸 코스·테를지 코스 등 3개의 트레킹 코스가 개발되었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는 몽골의 오랜 격언을 몽골 식민지였던 제주의 후손이 걷는 길을 내는 것으로 멋지게 실천해준 셈이다.
제주올레는 길에 대한 담론도 주도하고 있다. 2010년 ‘월드 트레일스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제주에서 첫 번째 ‘월드 트레일스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론리플래닛 창립자 부부도 참가했다. 규슈 올레·미야기 올레·몽골 올레와 함께 ‘아시아 트레일스 네트워크(ATN)’도 구축했다.
이제 제주올레는 서 선배가 찾아갔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해외 도보 여행자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2022년 9월 제주올레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잇는 ‘공동완주 인증제’가 도입돼 두 길을 각각 100㎞ 이상 걸으면 공동 완주증을 받을 수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제주에서 공동 완주증을 발급받은 516명 중 45%인 232명이 해외 도보 여행자다. 2023년 8%(25명), 2024년 21%(75명)로 갈수록 해외 도보 여행자 비중이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그렇게 제주의 길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말년의 서명숙은 자신의 쓰임을 온전히 사단법인 제주올레에 맡겼다. 길이 공공재이듯 인간 서명숙 또한 공공재였다. 길에 다양한 쓰임이 있듯 서명숙에게도 다양한 쓰임이 있었고, 그는 그것에 담담히 응했다. 제주올레를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걷기를 장려할 수 있는 곳이라면 흔쾌히 달려갔다.
입장료가 없는 제주올레는 수익모델이 많지 않았다. 서 선배는 제주올레의 ‘노년 가장’으로 열심히 강연료를 벌어와서 사단법인 제주올레 살림에 보탰다. 워런 버핏은 한 끼 식사를 팔았지만 서명숙은 자신의 걸음을 팔았다. 자신을 내세워 ‘CEO올레’ 프로그램을 만들어 후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올레길 효과를 지역 주민이 같이 누릴 수 있도록 고민했다. 길을 통해 마을 생태계가 활성화될 수 있는 방법을 돌집과 창고를 리모델링해서 여행자 쉼터로 활용하는 등 다양한 공간 재생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제주올레와 관련된 공간에 1호 단골손님이 되어 활성화에 기여했다.
30년 동안 기자로 활동한 그는 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제주올레를 구축하는 틈틈이 글을 썼다. 〈꼬닥꼬닥 걸어가는 이 길처럼〉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올레 여행〉 등 제주올레를 소개한 책도 내고, 〈흡연 여성 잔혹사〉 〈식탐〉 〈영초언니〉 등 다양한 에세이도 썼다.
이렇듯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서 선배는 인간으로서는 빈틈이 많은 사람이었다. 늘 옆 사람이 챙겨야 할 만큼 빠뜨리는 것이 많았다. 그렇게 허점이 많았지만 너른 품으로 제주를 안았다. 그러면서도 서 선배는 자기 신화에 갇히지 않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나 수백만 원짜리 특강을 하러 서울에 왔을 때나 괴나리봇짐 같은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지금도 어디선가 “야, 너 내가 죽은 줄 알았지? 걱정 마, 나 안 죽어”라며 술잔을 들이밀 것 같다. 피우고 싶은 담배 다 피우고, 마시고 싶은 술 다 마시고, 하고 싶은 욕 다 하며 살면서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올레길을 만들었다.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지만 남을 위한 업적도 남긴, 참 균형 잡힌 삶을 살았다. 지금 시대에 필요한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고재열 (여행감독·전 <시사IN> 기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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