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살 노동자의 죽음, 산재 인정받기까지
2024년 6월16일, 일터에 나간 열아홉 살 아들이 숨진 채 돌아왔다.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지만 회사는 어떤 답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아들의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상복을 입은 엄마는 아들이 일했던 공장 앞에 서서 ‘우리 아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물었다.

그 대답을 듣기까지 1년9개월이 걸렸다. 3월31일 광주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제지업체 전주페이퍼 전주공장에서 일한 박정현씨(당시 19세)가 “업무상 과로와 유해한 작업환경으로 사망”했다고 판단하고, 박씨의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박정현씨는 전남 순천의 한 특성화고에 재학 중이던 2023년 11월 전주페이퍼 전주공장에서 현장실습을 시작하고, 한 달 뒤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전주페이퍼는 골판지 원지, 신문용지, 출판용지 등 각종 산업용지를 만드는 공장이다. 박씨는 종이를 만드는 원료가 생산공정으로 넘어가기 전, 원료에 약품을 섞는 업무를 맡았다. 운전실에서 기계로 원료 배합을 조정하고 제대로 작동하는지 육안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박정현씨는 입사 후 전 공정을 돌며 업무를 배운 다음, 2024년 5월26일 해당 라인에 배치됐다. 그리고 20일 뒤 혼자 배관설비를 살피던 중 쓰러져 사망했다.
당시 전주페이퍼 측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현씨의 업무가 “기계를 정상 가동하기 전 원료의 준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단순 업무” “30년 이상 안전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던 파트”라고 주장했다. 유족 측은 동료 직원들의 제보를 토대로 황화수소 등 유독가스로 인한 급성중독과 질식을 의심했다. 공장 기계는 2024년 6월10일부터 사고 전날까지 6일간 멈춰 있었다. 유족 측은 기계가 멈춘 동안 기계에 남은 원료가 부패해 유독가스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회사가 응답하지 않자 유족은 2024년 6월20일부터 기자회견, 피켓 시위를 벌이며 문제를 알렸다. 아들의 장례를 치르지 못한 지 18일째 되던 2024년 7월4일, 박씨의 어머니는 단식에 돌입했다. 3일 후 회사 자체 조사에서 황화수소가 검출되자 유족과 회사 측은 책임 있는 사과와 진상규명, 재발 방지책 마련 등에 합의했다. 유족을 대리하는 박영민 노무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어머니가 단식을 하고 계시고, 정현이 장례를 계속 못 치르는 상황이었다. 회사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받으면 일단 합의를 하고, 처벌 등은 노동청과 경찰을 믿고 맡기자고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개인적 질병 때문이라는 결론
결과는 유족의 기대와 달랐다. 2024년 10월 광주지방고용노동청 전주지청(노동청)은 전주페이퍼가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2024년 12월 경찰은 박정현씨 사건을 ‘단순 사망’으로 보고 입건 전 조사 종결(내사 종결) 처리했다. 전주페이퍼 측에 업무상과실치사 등의 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는 의미다. 박씨 어머니의 친구인 김현주씨는 “노동청도 경찰도 회사도 정현이의 죽음이 개인적 질병 때문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건강하던 19살 아이가 일하다 쓰러져 1시간 동안 방치된 채 숨졌다. 이게 산재가 아니라면 가족들이 어떻게 정현이를 보낼 수 있겠냐”라고 물었다.
〈시사IN〉은 전북 전주덕진경찰서의 ‘입건 전 조사 결과보고서’를 입수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부검 결과와 노동청의 황화수소 측정 결과를 ‘단순 사망’ 결론의 주요 근거로 들었다. 국과수는 박정현씨의 사인으로 ‘심장비대증으로 인한 심근경색’을 꼽았다. 박씨의 혈액에서 황화수소와 관련된 황이온은 검출되지 않았다. 노동청은 박정현씨가 사망한 당일인 2024년 6월16일이 아닌 6월17·18·23일에 박정현씨가 발견된 장소와 주변 배관 등에서 발생한 유해가스를 측정했고, 황화수소는 검출되지 않았다.

유족 측은 부검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다. 박영민 노무사는 “직업환경의학과 자문의 및 전문가들은 황화수소의 휘발성, 유독가스 검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사하지 않으면 황화수소 등 유독가스를 체내에서 검출하기 어렵다는 소견을 밝혔다. 또 황화수소는 휘발성이 강해 체내에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부검 당시 2차 조사로 소변검사, 혈액검사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황이온 등이 검출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노동청 조사에 대해서도 부실 조사 논란이 제기된다. 노동청 조사에서는 황화수소가 검출되지 않았지만, 정작 회사 자체 조사 결과는 달랐다. 2024년 7월7일 전주페이퍼 측이 ㈔대한산업보건협회 전북지부에 의뢰해 박정현씨가 사망한 당일 근무 환경과 최대한 유사한 조건을 맞춘 뒤 유해가스를 측정한 결과, 황화수소가 측정 한계치인 100ppm을 초과해 검출됐다. 30분 뒤 다시 측정했을 때도 4~5ppm의 황화수소가 검출됐다. 유족들은 이를 근거로 “황화수소 중독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라고 주장했다.
당초 유족들은 박정현씨 사망 두 달 후인 2024년 8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가 한 차례 포기했다. 산재 입증 책임이 유족에게 있기 때문에 그 뒤에 나온 경찰과 노동청 결론을 반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신 최대 6일 연속 심야 노동(오전 0시~오전 8시)에 불규칙한 연장 근무, 4조 3교대 근무, 밀폐된 현장, 85dB(데시벨) 이상 소음에 계속 노출되는 등 열악한 노동환경을 부각해 2025년 10월 다시 산재를 신청했다.

박정현씨가 사망하고 1년9개월이 지난 3월31일, 광주광역시 남구청 3층 광주질병판정위원회(질병판정위) 회의실에서 산재 심의 회의가 열렸다. 심의가 열리기 전 회의실 앞에는 유족을 돕는 이들 8명이 ‘유독가스 노출과 열악한 노동환경이 사망의 원인이다’ ‘고 박정현님의 산업재해 즉각 승인하라’ ‘고용노동부는 계속되는 노동자 사망에 철저한 안전대책 수립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섰다. 질병판정위는 대부분 당사자들의 입장을 서면으로 확인한다. 하지만 이날은 재해자인 박정현씨 측 3명과 전주페이퍼 측 5명이 질병판정위에 직접 출석해 진술했다.
심의 끝에 이날 질병판정위는 박정현씨 죽음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시사IN〉이 입수한 ‘업무상질병판정서’에 따르면, 질병판정위는 박씨의 업무 환경에 주목했다. “4조 3교대로 업무를 수행했고, 고인이 근무한 장소의 소음 측정치가 최저 82.3dB, 최고 89.3dB로 고인이 업무 수행 과정에서 업무 부담 가중 요인에 복합적으로 노출된 것으로 판단해, 비록 고인이 심장질환의 개인적 소인이 있다 해도 교대제 업무, 소음 등 업무상 부담 요인이 상당 부분 작용해 사망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약속 지킬 수 있어 다행이다”
사건 초기부터 박정현씨 유족 측과 연대한 민주노총 전북본부는 “회사는 개인 지병에 의한 단순 사망으로 몰아가며 사고의 본질을 축소·은폐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 질병판정위의 산재 승인으로 안전 보호조치 의무 위반, 고강도 노동, 복합적 유해 요인이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산재 은폐 시도에 대한 회사 측의 공식 사과와 책임자 처벌,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의 초동 대응 실패 인정 및 사과, 재발 방지를 위한 실효성 있는 산업안전 대책 수립 등을 촉구했다. 전주페이퍼 측은 〈시사IN〉에 “관계 기관 결정에 대한 특별한 입장은 없다”라고 밝혔다.

박정현씨는 꿈이 많은 청년이었다. 그가 남긴 수첩에는 ‘2024년 목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남에 대한 얘기 함부로 하지 않기, 하기 전에 겁먹지 말기, 기록하는 습관 들이기, 운동하기, 구체적인 미래 목표 세우기, 예체능 계열 손 대보기, 블로그, 일기 쓰기, 사진 많이 찍어두기, 친구들에게 돈 아끼지 않기···.” 수첩에는 성장하겠다는 다짐(“조심히 예의(있게), 안전(하게) 일하겠음. 성장을 위해 물어보겠음. 파트에서 에이스 되겠음”)과 함께 앞으로의 계획(“2025년 5월 공군 입대, 2027년 2월까지 6000만원 모으기”)도 담겨 있었다.
박정현씨 1주기 하루 전인 2025년 6월15일, 순천시립추모공원에서 ‘전주페이퍼 만 19세 청년노동자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유족을 비롯해 박씨를 기억하는 5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20대 초반 박씨의 친구들은 많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 군대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첩에 적힌 박씨의 계획대로라면, 그도 공군에 입대했을 나이다. 박영민 노무사는 “1주기 추모제 때 너무 미안해서 어떤 말도 하기 어려웠다. 2주기 전에는 꼭 산재 결정을 받아 정현이의 억울함을 달래주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김현주씨는 유족과 전주페이퍼 측이 합의한 다음 날인 2024년 7월8일을 떠올렸다. 이날 박정현씨를 태운 운구차가 전주페이퍼 공장을 한 바퀴 돌았다. “비가 쉴 새 없이 내려 이게 정현이 눈물인가 싶었다. 그때 정현이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려고 공장에서 젊은 친구들 몇 명이 달려 나왔다. 정현이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는, 차마 말하지는 못하지만 이게 너무 억울한 죽음이라고 생각하던, 그 현장에 있는 젊은 청년들에게도 정현이 산재 소식이 위안이 되면 좋겠다.”
광주·이은기 기자 yieu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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