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전 쓰인 책에서 발견한 참신함 [기자의 추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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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열풍'에 힘입어 이 책을 지면에 소개하겠다고 하니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두 나라 장수가 무협소설처럼 각축을 벌이는 트로이전쟁의 풍경도 이 책에는 없다.
주요 소재인 치정과 복수, 전쟁이 시대와 장소만 바꿔 되풀이되기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무려 2500년간 수많은 사람이 즐겨온 '고전들의 고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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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펴냄

‘고전 열풍’에 힘입어 이 책을 지면에 소개하겠다고 하니 아내가 핀잔을 주었다. 인기 있는 건 19~20세기 문학이지 발음조차 어려운 ‘그런 책’은 아니라고. 하지만 제목의 단어 하나하나가 벽처럼 느껴지는 책을 권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익히 아는 이름들이 등장한다. 그리스신화의 여러 신과 대중매체가 다루는 영웅들이다. 다만 그들이 얽힌 이야기가 새롭다.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에서 떠오르는 위풍당당한 풍모는 보이지 않는다. 정신착란으로 처자를 죽이고 절망하는 인간의 이야기만 따왔다. 두 나라 장수가 무협소설처럼 각축을 벌이는 트로이전쟁의 풍경도 이 책에는 없다. 나라가 망한 뒤 참살되는 아이, 노예가 되는 여성의 모습을 담았다.
끔찍한 이야기를 견뎌도 카타르시스는 느끼기 어렵다. 패전국 사람들은 별다른 반전 없이 한탄하며 끌려간다(〈트로이아 여인들〉). 갈등 끝에 참담한 방식으로 복수한 이들은 시원한 입장 정리 없이 퇴장한다(〈메데이아〉 〈엘렉트라〉). 인과응보의 사슬은 뭉텅뭉텅 끊긴다. 핵심 사건의 동력은 신의 뜻, 운명의 장난이다. 여러 작품 끝에 공통되게 붙는 시구가 이 정서를 대변한다. “신들께서는 많은 것을 예상과 다르게 이루시지요. (중략) 여기 이 사건도 그렇게 일어났어요.”
사멸한 신들을 탓하는 ‘허무’한 이야기가 어떻게 그 긴 세월 살아남았을까. 주요 소재인 치정과 복수, 전쟁이 시대와 장소만 바꿔 되풀이되기 때문일 테다. 마찬가지로 비극의 대가로 꼽히는 소포클레스가 남긴 말이 있다. “나는 응당 따라야 할 인간의 모습을 다뤘다. 에우리피데스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그렸다.” 잔인한 본성, 어리석은 선택, 반성하고 좌절하다 결국 운명만 탓하는 우리 인간의 면면은 변치 않았다.
오늘날 이름난 콘텐츠 중 100년, 500년이 지나면 얼마나 남을지 이따금 상상한다. 덧없고, 주간지 기자에게는 위험하기까지 한 감상이다. 그럼에도 무려 2500년간 수많은 사람이 즐겨온 ‘고전들의 고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위안이 된다. 이 책은 숱한 이야기의 원형이다. 근대 유럽 소설부터 최신 넷플릭스 드라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곳에 닿는다. 그 모두가 인간이 자신을 고찰해온 흔적이다. 각종 변주와 재해석에 익숙한 이라면 도리어 원전의 참신함에 반색할 것이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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