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마법 사라지고 빗장 걸린 IPO…‘해외·파생’ 우회로 찾는 기업들
[비즈니스 포커스]

국내 자본시장의 자금조달 지형도가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단순히 고금리 탓이 아니다. 수십 년간 기업 경영의 안전판이었던 자사주 활용 수단이 3차 상법 개정으로 막히고 이사의 충실의무가 주주로 확대되면서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부담이 이전보다 커졌다.
기업들은 이제 국내 부채자본시장(DCM) 시장 한계를 넘어 미국 증시와 해외 메자닌, 토큰증권(STO) 시장으로 탈출구를 찾고 있다.
“중복상장, 디스카운트 주범” 대통령 발언에 멈춰선 IPO
지난 1월 22일 이재명 대통령이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오찬에서 던진 발언은 대기업 계열사 IPO 시장을 사실상 시계 제로 상태로 밀어 넣었다. LS그룹 논란 사례를 가리켜 “‘L자 들어간 주식은 안 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중복상장을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했다.
LS그룹이 추진하던 미국 증손회사 에식스솔루션즈 상장은 결국 나흘 만에 철회됐다. 정부가 중복상장 가이드라인 강화를 예고하면서 자회사 상장을 통해 투자 재원을 마련해 온 대기업의 ‘쪼개기 상장’ 전략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는 평가다.
IB 업계 관계자는 “대통령이 특정 그룹을 연상시키는 비유를 써가며 질타한 이상 IPO 대신 구주 매출이나 외화 교환사채 발행으로 조달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스프레드 65.6bp의 착시, 초우량주만 웃는 시장
4월 8일 기준 회사채(AA-) 신용 스프레드는 65.6bp 수준이다. 지표는 견고하나 속내는 양극화가 극심하다. 공사채 AAA 32.7bp, 회사채 A+ 100.0bp로 등급 간 시장 접근성 자체가 갈렸다는 점이 핵심이다.
온기는 업황이 뒷받침된 초우량주에만 집중되는 양상이다. 평균치의 함정에 가려진 채 비우량 기업들은 시장 진입 자체가 차단되는 ‘돈맥경화’를 앓고 있다는 지적이다.
신용등급이 A+에서 AA-로 상향된 HD현대는 이날 500억원 규모 회사채 수요예측을 실시했다. 조선 부문 계열사 HD한국조선해양의 순현금 6조7000억원 확보가 지주사 신용도를 견인한 결과다. 최대 1000억원까지 증액 발행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등급 상향이라는 방패로 조달 비용을 낮추는 기업이 있지만 중동 리스크에 노출된 석유화학이나 재무구조가 흔들리는 기업들은 발행 시장 관망세가 이어지면서 기업 간 자금조달 여건 차이가 뚜렷해지고 있다.

“이자 비용 수천억 아낀다” 우량주의 영리한 금리 쇼핑
국내 조달 환경 악화 속에 우량 기업들은 자회사 지분을 활용해 금리를 극적으로 낮추는 ‘영리한 조달’에 집중하는 추세다.
HD한국조선해양은 자회사 HD현대중공업 주식을 기초자산으로 최대 20억 달러 규모 해외 교환사채(EB)를 발행한다고 공시했다. 표면이율 1%, 만기 5년의 파격적 조건이다. 동일 규모를 연 4% 수준 회사채로 발행했을 때와 비교하면 5년간 이자 비용만 수천억 원 차이다.
채권 시장의 온기가 우량주에만 머무는 사이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자산 가치를 담보로 비용 극최소화를 실현한 포석이다. 조선업 호황으로 주가가 높게 평가받는 시점을 최소 비용의 실탄 확보 기회로 활용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확보된 자금은 마스가(MASGA·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 추진 재원 및 소형모듈원자로(SMR), 수소연료전지, 해상풍력 등 차세대 에너지원 개발 투자에 활용될 예정이다. 지분율이 69.2%에서 63.4%로 낮아지며 단기 오버행 우려가 나오지만 할증 발행으로 EPS 희석을 방어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고도 추가 현금화에 나선 배경에 대해 시장과의 적극적 소통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이다.

SK하이닉스의 미국행,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낳은 역설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패권 사수를 위해 미국 증시에서 최대 15조원 규모의 미국 주식예탁증서(ADR) 상장을 추진한다. 3월 6일 공포·시행된 3차 개정 상법이 자사주를 취득일로부터 원칙적으로 1년 내 소각하도록 의무화한 것이 결정적 배경이 됐다.
당초 자사주를 활용한 ADR 발행을 검토했으나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신주 발행으로 방향을 틀었다.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은 주주총회에서 “세계 최대 자본시장에서 기업가치를 재평가받겠다”며 미국행을 공식화했다. 선행 주가순자산비율(PBR)이 마이크론(4.3배) 대비 낮은 수준(SK하이닉스 2.2배)에 그치는 만큼 미국 상장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뚫는 리레이팅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
다만 논란은 여전하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35조원의 현금을 보유하고도 소각 규모와 유사한 수준의 신주를 발행해 지분을 희석하는 것은 주주 충실의무 정신에 반한다”고 비판했다. 포럼은 이어 “추가 발행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어 기존 주주 지분 희석 규모가 상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화솔루션·SK(주)·LS전선, 각자도생 실험
재무 구조 개선이 시급한 기업들은 주주배정 유상증자라는 정공법의 독배를 들었다. 한화솔루션이 의결한 2조4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가 대표적이다. 조달액의 62%가 채무 상환에 투입되는 전형적인 ‘생존형 조달’이라는 비판 속에 주가는 기습 발표 직후 18% 넘게 하락했으나 대주주인 (주)한화가 배정 물량의 120% 초과 청약(약 8439억원)을 결정하며 반전의 물꼬를 텄다.
김승연 회장, 김동관 부회장 등 대주주 일가가 지분 54%를 보유한 (주)한화가 실권주까지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시장의 청약 부담을 완화하고 책임 경영 신호를 보낸 포석이다. 이는 지난해 3조6000억원 규모 유증 발표 직후 주가가 급락했다가 1년 만에 140% 이상 폭등한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학습 효과를 노린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당시에도 (주)한화는 배정 물량을 전량 인수하며 중장기 성장에 대한 신뢰를 방어한 바 있다. 시장의 시선은 엄격하다. 금융감독원은 한화솔루션이 제출한 유상증자 증권신고서에 대해 "중요 사항이 기재되지 않았거나 불분명해 투자자의 합리적 판단을 저해할 수 있다"며 정정신고서 제출을 요구한 상태다.
재무 건전성 사수를 위해 파생 구조를 택한 사례도 있다. SK(주)는 SK바이오팜 지분을 매각하며 주가수익스와프(PRS) 계약을 병행했다. 부채비율을 높이지 않고 현금을 수혈하는 방식이다.
다만 주가 하락 시 차액을 보충해야 하는 우발채무 위험은 상존한다. 주가가 발행가(11만4500원) 아래로 내려갈 경우 차액을 현금으로 보충해야 하는 구조로 계약 만료 시점이 잠재적 부담으로 남는다.
LS전선은 구리·희토류 등 원자재 재고 1조4566억원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토큰증권(STO) 발행이라는 금융 실험에 나섰다. 매년 4조원 가까이 원자재 확보에 투입하느라 미래 투자 재원이 충분하지 않다는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다.
명노현 LS 부회장은 주주총회에서 “중복상장 없이도 투자 여력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다만 STO 관련 법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올해 안에 마련돼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박건영 KB증권 애널리스트는 “LS는 STO를 통해 중복상장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구리와 희토류 기반의 투자 대안으로 재평가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3차 상법 개정의 취지는 명확하다.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악용하던 관행을 바로잡고 주주 이익을 제고하는 방향이다. 하지만 자사주 소각 의무화로 기업들의 국내 조달 수단이 위축된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는 마땅치 않다.
전통적인 DCM 시장의 위축과 해외 메자닌 시장의 부상은 국내 금융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들의 잇따른 해외 조달과 변칙적 실험은 국내 금융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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