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지브리 할아버지의 3598일 작업 브이로그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백수진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199번째 레터는 오늘(15일)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지브리 사상 최장 기간, 최대 제작비를 투입한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하 ‘그어살’)의 특별한 작업기가 담겼는데요. ‘그어살’은 미야자키의 작품 인생이 집약된 역작이라는 호평과 함께 2024년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까지 받았지만, 다소 난해한 전개 탓에 “미야자키 하야오가 노망이 났다”는 혹평도 뒤따랐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왜 그런 영화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다큐멘터리는 미야자키가 은퇴를 선언했던 2013년부터 ‘그어살’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3598일, 무려 9년에 걸쳐 그를 밀착 취재한 기록입니다. 촬영 분량만 1000시간이 넘었는데요. 영화를 보면 그야말로 창작의 산고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일본 NHK에서 방영된 시리즈를 120분 분량의 영화로 다시 엮었습니다.

애니메이션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미야자키의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입니다. 작업이 막히면 앞치마 차림으로 동네 산책을 다니고, 지나가던 동네 꼬마가 ‘지브리 할아버지죠?’라고 묻자 웃으며 손을 흔들어줍니다. 작업실에 찾아온 유치원 아이들에게 젤리를 나눠주기도 하고요. 거장의 창작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지만, 이웃집 할아버지의 브이로그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는 미야자키가 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다시 작업에 뛰어든 이유에서 출발합니다.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부터 지브리 작품의 색채 디자인을 맡아온 야스다 미치오의 한마디가 계기가 됐습니다. 암 투병 중이던 야스다는 미야자키에게 “작품 하나 더 해라. 아직 살아 있으니 해야 한다”고 말하죠. 그 한마디가 노장을 다시 움직이게 했습니다.

제작에 돌입했을 당시 미야자키의 나이는 78세. 그는 일정표에 ‘살아 있을까?’라고 적어둡니다. 다큐멘터리 전반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50년 넘게 함께한 동료이자 라이벌, 동경과 애증의 대상이었던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부터 가까웠던 친구들의 잇따른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깁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괴로워하고, 불면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모습도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왜 나만 살아 있을까”라는 그의 넋두리는 ‘그어살’이 왜 그토록 무겁고 철학적인 영화가 되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번 다큐멘터리에서만큼은 유독 불안과 좌절, 피로를 숨기지 않습니다. 보다 보면 저러다 정말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해질 정도예요. 쇠약해진 거장의 모습을 이렇게 날것 그대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벼랑 위의 포뇨’부터 20년 가까이 미야자키를 기록해 온 아라카와 가쿠 감독 덕분입니다. 카메라는 마치 오랜 친구가 곁에서 지켜보듯 그를 따라갑니다. 때로는 짓궂은 편집으로 미야자키를 놀리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곁을 지키며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묵묵히 담아냅니다.

이야기가 무거워질 만하면, 지브리 공동 창립자이자 프로듀서인 스즈키 토시오가 튀어나와 웃음을 줍니다. ‘그어살’에서 주인공 마히토를 이세계(異世界)로 안내하는 왜가리는 스즈키를 모델로 한 캐릭터죠.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아는 두 사람의 티격태격은 이 다큐의 뜻밖의 재미입니다. 책상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미야자키를 보고도 스즈키는 여유로워 보입니다. 스즈키는 “고통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쾌감을 느끼고 있다”고 능청스럽게 말하죠. “감독님에게는 영화 속 세계가 현실이에요. 현실 세계는 오히려 허구죠.”
그의 말처럼 다큐멘터리도 꿈과 현실을 넘나들듯, 애니메이션 속 장면과 미야자키의 삶을 교차시키는 연출로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지브리 팬들에겐 더없이 반가운 선물이 될 듯합니다.

무엇보다 번번이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연필을 쥐는 거장의 모습에선 광기에 가까운 집념이 느껴집니다. 미야자키 감독은 “영화에 목덜미를 잡혀서 도망칠 수 없다”고도 표현하죠. 사무실 구석의 작은 책상에 앉아 한 컷을 며칠씩 붙들고 있고, 연필과 지우개로 고치고 또 고치며 집요하게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 갑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물었던 거장은, 자신의 치열한 삶으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괴로워도 멈출 수 없고, 끝내 무언가를 만들어야만 하는 사람. 80대 거장이 자신에게 건네듯 마지막에 남긴 메모는, 보는 이의 정신까지 번쩍 들게 합니다. “우는 소리 그만하고 전진하자.” “만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 다들 ‘그어살’이 정말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미야자키 감독은 다시 스튜디오로 출근해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하죠. 머지않아 그의 신작을 볼 수 있길 바라며, 이번 레터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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