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너머] '중동 식단'에 길든 한국 경제

"면역력을 키워야 합니다. 기초 체력도 꾸준히 기르시고요."
매일 아침 주부들의 안방을 지키는 장수 건강 TV 프로그램들의 '공통어'다. 병이 난 뒤 독한 약을 쓰기보다 평소 몸의 면역력을 키워 바이러스를 이겨내라는 당연한 충고다. 우리 물가 정책도 마찬가지다. 중동 전쟁 여파로 유가가 요동치자 정부는 30년 만에 '석유 최고가격제'라는 카드를 꺼냈다. 하지만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바이러스가 침투할 때마다 해열제에만 의존하는 건 한계가 명확하다. 이제는 약봉지를 뒤적이기보다 외부 충격을 견딜 체질 자체를 바꿔야 할 때다.
결국 근본적인 구조 개선이 시급하다. 국내 정유·석유화학 설비 대다수는 수십 년간 중동산 원유라는 특정 식단에만 길들여진 소화기관과 같다. 중동산 원유(중질유)가 아니면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구조다. 공급원이 한곳에 쏠려 있으니 중동에서 작은 불씨만 튀어도 산업 엔진은 과부하가 걸린다. 이런 편중된 구조를 둔 채로는 정부가 늘 시장의 팔을 비틀어야 하는 '통제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당장 중동산 석유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쉽지 않다. 러시아산이나 캐나다산 비중을 늘리라는 조언도 있지만, 도입 비용과 경제 가치를 따져보면 현실적으로 어렵다. 캐나다산은 운송 거리가 멀어 비용 부담이 크고 시간도 두 배 넘게 소요된다. 러시아산은 미국의 경제 제재로 안정적 수급을 담보하기 어렵다. 결국 가격이 저렴하고 도입 기간이 짧은 중동산 원유는 여전히 매력적인 '주식(主食)'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설비를 바꾸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국내 정유사들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1.7% 내외로 시중은행 금리보다도 낮다. 기업 스스로 막대한 자금을 들여 플랜트를 경질유까지 소화 가능한 잡식성 설비로 개조하기엔 기초 체력이 바닥난 상태다. 위기 때마다 전매 특허처럼 등장하는 "수입선 다변화가 정답"이라는 해묵은 조언이 현장에서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이제는 구호가 아니라 호주나 일본처럼 정부가 직접 재정을 투입해 산업 설비 고도화를 뒷받침해야 한다.
정부는 가격 감시자를 넘어 에너지 안보를 재설계해야 한다. 당장의 가격표를 붙잡고 씨름하기보다 우리 산업이 어떤 원유도 소화할 수 있는 기술적 적응력을 갖추도록 과감하게 지원해야 한다. 땜질식 처방으로 버티는 시대는 지났다. 중동 날갯짓 한 번에 독감을 앓는 취약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유 종류에 구애받지 않는 설비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외부 충격을 흡수하는 한국 경제의 핵심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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