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희의 몸짓 탐구생활] [18] 사라진 몸짓이 전하는 이야기

봄이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된다. 공원이나 산도 좋지만 동네를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흩날리는 벚꽃과 향기로운 라일락, 막 움트기 시작한 연두색 새싹을 보며 계절을 감각한다. 문득 시선을 낮추면 자연의 풍경 사이에 인간의 흔적이 스며든다. 대개는 쓰레기나 분실물이다. 그런데 다소 뜬금없이 놓인 사물들을 유심히 바라보면 그것은 마냥 쓰레기가 아니라 누군가의 몸짓을 담은 증거가 된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체로 수동적이다. 꽃을 감상하고 나무에 감탄하며 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인다. 반면 인간의 흔적 앞에선 태도가 달라진다. 거기엔 나와 같은 몸을 지닌 존재가 있다. 그 몸을 상상하는 순간 호기심과 공감이 발생한다.
인간은 타인의 몸의 경험을 자신의 몸으로 공감할 수 있다. 무용학자들은 이를 ‘운동감각적 공감’이라고 부른다. 이를 좀 더 밀어붙이면 눈앞의 움직임뿐 아니라 이미 사라진 움직임까지도 몸으로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공감은 무용수보다는 탐정의 기술일지 모른다. 나는 어느덧 사라진 움직임을 추적하는 탐정이 되어 거리를 걷는다.
놀이터 옆 벤치에 놓인 옷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어떤 아이가 놀다가 벗어 놓고 갔겠지. 그런데 그 옷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지 않았다. 여러 벤치 중에서도 길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가지런히 접혀 놓여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발견하고 주인이 찾기 쉽도록 옮겨 놓았을 것이다. 두리번거리며 주인을 찾았을 눈길과 잠깐의 망설임, 그리고 옷을 살포시 접어 올려두었을 조심스러운 손길이 떠오른다.
놀이터 근처를 둘러보니 벽돌 담장 틈에 구겨 넣은 사탕 껍질과 기둥 아래에 숨기듯 세워둔 물병이 보인다. 주위를 살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움직인 뒤 서둘러 자리를 떴을 몸짓이 보인다.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리면 아파트 정원 앞 벚나무 가지에 걸린 빨간 줄넘기가 보인다. 아이들이 놀다가 던져 올린 걸까 생각해보았지만 줄넘기는 묶인 채로 걸린 것을 봐선 아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위에서 아래로 던져주려다가 걸렸을 것이다.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그 어긋난 궤적을 둘러싼 상황을 상상하는 일 자체가 흥미롭다.
거리의 사물들은 사라진 몸짓의 잔여물이다. 단순한 쓰레기나 분실물이라 치부할 수 있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타인의 움직임을 읽어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몸들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 작은 흔적들이 남았다. 어느새 거리는 사라진 몸짓이 전하는 이야기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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