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있는 지리산 둘레길] 에필로그 지리산 둘레길을 끝내며
800리 수많은 이야기와의 만남, 가슴으로 느껴야 진정한 의미 깨닫는 곳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
예로부터 수많은 선인이 지리산을 다녀가면서 그 여정을 글로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들 수 있다.
이륙의 ‘지리산기(智異山記)’를 필두로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부터 조식의 ‘유두류록’, 유몽인의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지리산을 찾았고 그 소회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들의 지리산 유람은 천왕봉과 주능선 일부를 거치는 등산 경로도 있지만, 현재의 지리산 둘레길과 많은 부분 겹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선대의 기록과 흔적을 토대로 청학동을 찾고자 이 산 골골을 누비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객(遊客)은 막연한 은일의 귀의처를 잡고자 지리산을 찾은 것이 아니라, 지리산 유람에서 자아 성찰과 심성 수양 자세를 다잡는 계기를 마련하고, 역사적 흔적을 마주하면서 역사 인식을 확인하는 등 현실적인 문제를 다뤘다.

이륙의 지리산기는 조선조 최초의 지리산 유람록으로 그 시원을 열었고, 김종직의 유두류록은 그의 문인 김일손·남효온을 비롯한 후대의 선비들을 지리산 유람으로 이끌었던 첫머리가 됐다. 김일손은 스승 김종직이 지리산 유람에서 돌아왔던 행로를 출발점으로 삼아 함양에서 등구재를 넘었다. 그는 스승의 ‘유두류록’을 이어 쓴 것이라는 의미로 자신의 유람록을 ‘속두류록(續頭流錄)’이라 했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기 위한 성심이리라.
조식은 그의 유두류록에서 ‘한유한·정여창·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에 비교한다면, 십 층 봉우리 위의 옥(十層峯頭冠一玉) 하나 더 올려놓은 격’이라면서 선대 인물에 대한 경모와 역사를 회상했다. 이에 그의 문인 박여랑은 두류산일록(頭流山日錄)에서 스승(정인홍)의 스승인 남명을 ‘천 길 봉우리(천왕봉) 위에서 또 천 길을 바라보는 격’이라며, 크게 은둔한 기상을 우러러보았다. 과연 그 스승의 그 제자들이었다.
스승과 제자, 선인과 후인, 선답자와 후답자. 이들은 앞선 이들의 유람록에 담긴 발자취를 토대로 지리산 여정을 채우면서 자신의 사유와 감성을 지리산 유람록에 함께 담았다. 이렇듯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었다. 지리산이란 거대 담론을 다양한 색깔과 아름다운 관계로 엮어내고 있었다. 인문학적 변주곡이었다. 현재 우리가 걷는 지리산 둘레길에도 선인과 후인, 선답자와 후답자의 인문학적 변주곡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둘레길 개념
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사람들 모두에게도 길이 있다. 누구에게나 각자가 추억하는 길이 있을 것이고, 현재 마주하고 있는 길은 물론 앞으로 만나길 희망하는 미지의 길도 있을 것이다. 천둥벌거숭이의 유년 시절 뛰놀던 산길·들길, 아득한 기억의 학굣길, 풋풋한 첫사랑의 골목길, 치열한 경쟁으로 빼곡한 생활의 현장길 등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수없이 많은 길 위에서 우리는 삶의 여백을 채워간다. 이것이 인생 노정이다. 그곳에는 농투성이의 질박한 삶이 어우러진 논길·밭길이 있는가 하면, 은일을 찾아 나선 선비의 유람길, 깨달음을 향한 수행자의 구도 길도 있을 것이고, 낭인의 유랑길, 장돌뱅이의 장삿길, 산꾼의 산길 등 무수한 길이 얽혀 있을 것이다. 그 길 위에 긴 세월 수많은 사연의 발자국이 찍히면서 인문학 담론을 엮어 왔고 또 엮어 나갈 것이다.
그렇다면 둘레길은 어떠한 길일까? 둘레길은 사전적 의미로 ‘산을 밖으로 둘러싸는 둘레를 도는 길, 또는 도시의 둘레를 도는 길’이라 할 수 있으나, 예전부터 사용된 용어는 아니었다. 2007년 경기관광공사가 과천 서울대공원의 호수 둘레길을 소개하며 최초로 언론에 보도된 신조어라고 한다.(위키백과) 법률적으로는 2011년 ‘산림문화·휴양에 관한 법률’에 ‘(제5장) 숲길’을 신설하면서 도입된 용어였다. 이 법에 따르면 숲길의 종류로 등산로·트레킹길·산림레포츠길·탐방로·휴양 치유숲길을 명시하면서 트레킹(trekking)길의 하위 개념으로 트레일(trail)과 함께 둘레길을 규정했다.
현재 전국적으로 다양한 둘레길이 조성되고 저변이 확대되면서 둘레길은 이미 대중화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말하자면 둘레길은 여러 길 중 하나를 이르는 보통명사로 쓰이기보다 특정 장소나 지역과 함께 사용되면서 고유명사화되어 그 장소와 지역의 둘레길을 특정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산림휴양법상 ‘숲길’에 규정한 레포츠, 등산 영역까지 확대함은 물론 관광·레저·답사 등에 혼용돼 사용되기도 한다. 한편, 둘레길을 동네 한 바퀴 도는 정도의 가벼운 산책으로 취급하거나, 단순한 눈요기 중심의 관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지리산 둘레길 위에서
우리는 지리산 둘레길 800리를 한 바퀴를 돌아 반환점을 앞두고 있다. 이제 우리가 걸어 왔던 지리산 둘레길을 마무리할 때가 됐다. 지리산 둘레길을 개괄하자면 ‘지리산을 중심으로 바깥에서 둘레를 도는 길’ 또는 ‘내(內)지리를 중심으로 하여 외(外)지리를 환형으로 도는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외지리에서 내지리를 바라보며 걷는 망(望)지리의 순례길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3구간(인월~금계) 북지리의 장항마을 소나무 당산과 등구재의 창원마을 후면, 그리고 금계마을 후면에서 조망되는 천왕봉은 천혜의 승경이라 이를 만하고, 제5구간(동강~수철) 동지리의 쌍재·고동재 능선에서 보이는 천왕봉의 머리는 신비롭기 그지없다. 제15구간(가탄~송정) 남지리의 목아재에서 반야봉·불무장등을 포함한 주능선 조망과 마지막 구간(산동~주천)인 밤재에서 조망되는 노고단과 종석대를 위시한 서지리 연봉들의 파노라마 역시 환상적이다. 이렇듯 지리산 둘레길에서 천왕봉을 비롯해 지리산 주능선의 연봉을 조망하는 곳이 산재하는데, 하나같이 명승이다.
그러나 지리산은 눈으로만 담을 수 있는 산이 아니다. 몸으로 담고, 가슴으로도 담아야 한다. 지리산에 담긴 역사도 담고, 신화도 담고, 사람들의 살 내음도 담아야 한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과 벽송사 미인·도인송, 쌍계사 (금당) 육조정상탑, 그리고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앞에서 막연한 느낌이라도 담아보라. 폐사지 단속사 동서 삼층석탑의 망연한 모습과 숱한 화마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연곡사 승탑의 섬세함을 살펴보라. 굳이 문화유산에 대한 전문적 지식은 필요 없다. 그저 눈에 들어오는 대로 가슴에 담으면 된다.


구례 산동의 밤재와 산청 금서의 고동재에서 그곳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무자비한 학살군의 역사를 더듬어 보라. 1597년 추석 이틀 전, 왜군은 남원성을 초토화하기 위해 밤재를 넘었고, 1951년 설 이튿날, 국군은 양민을 학살하기 위해 고동재를 넘었다. 슬픈 역사, 어처구니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닮은꼴 역사의 현장도 있다. 내지리의 깊숙한 달궁. 그곳은 마한 왕의 피난살이 행궁터였다. 1951년 10월, 이현상 남부군은 토벌군에 밀리고 밀리다 달궁에서 피난의 자리를 잡았다. 1700년 전의 마한 왕이 그랬던 것처럼.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산청 덕산의 산천재 앞마당에서 남명의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 시구를 읊어보면서 천왕봉을 올려보라. 어떤 울림으로 다가서는지 가슴을 열어 보라. 그리고 구례 오미의 운조루에서는 타인능해의 쌀뒤주와 난쟁이 굴뚝을 살펴보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느낄 수만 있다면 이미 문화유산 답사는 완성된 것이다.
이렇듯 지리산 둘레길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마주한다. 지리산 둘레길에서의 중심은 둘레길이 아니라 지리산이다. 그래서 둘레길에서의 풍경도 지리산이어야 하고,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지리산의 역사와 문화유산이어야 한다. 외지리의 둘레길에서 내지리를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굳이 지리산 둘레길만 고집할 것은 아니다. 지리산 길이면 된다.
그곳에는 우리들과 우리들의 앞선 세대의 인생 노정이 있을 것이고, 오랜 세월 퇴적되어 온 역사와 신화의 길도 있을 것이다. 영광의 희열과 치욕의 아픔, 희망과 절망, 고난의 파란중첩과 평온의 무풍지대가 얽혀 있을 것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이 모든 것이 녹아 있는 길이다. 그래서 사전적으로나 법률적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지리산만의 길이다.
◇구간 연번의 혼선
지리산 둘레길의 총구간을 21구간으로 넘버링한 곳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22구간으로, 또 어떤 이는 23구간으로 나누기도 했다. 필자의 경우에는 20구간으로 넘버링하면서 18구간을 아예 빼버리기도 했다. 이 모두 합리적 논리를 가지고 주장하기 때문에, 맞다 틀리다 단정 지을 수 없다. 다만 필자의 분류한 구간과 관련해 변명 아닌 해명이라도 해야 이 글을 홀가분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 환형의 여정이다. 따라서 각 구간에서 가지를 친 지(支)구간까지 본(本)구간의 숫자에 산입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자면 하동의 서당마을-하동읍 구간이 이에 해당한다. 한편, 구례의 ‘오미-방광’과 ‘오미-난동’ 구간은 환형의 지리산 둘레길 개념으로 볼 때, 그것이 안쪽에서 도는 것과 바깥에서 도는 것의 차이일 뿐 중복된 구간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지리산 둘레길을 19개의 구간으로 개념 짓고, 다만 ‘오미-방광’의 17구간, ‘오미-난동’의 18구간으로 넘버링한 것 중에 중복된 18구간을 뺀 것이다. 이에 대한 가부의 평가는 여러분들의 몫으로 돌리고자 한다.

글·사진= 황부호 작가
Copyright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