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변한 단골집 단박에 발길 끊듯, 비정해도 탓할 수 없는

김용출 2026. 4. 14.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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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두 번째 소설집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미술강사 효원과 부유한 수강생 주영
친밀했던 사이, 계약논리에 바로 깨져
손 작가 “주영, 이 시대 대표적 소비자”
소설집 차가운 방향만으로 가지 않아
‘피아노’ 등 따뜻한 톤으로 균형 유지

‘믿을 구석’이라. ‘믿음’이라는 단어와 ‘구석’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은 어딘가 언밸런스한 느낌이 들었다. 믿음이라는 말이 긍정적이고 따뜻한 이미지라면 ‘꺾여 돌아간 곳의 안쪽 공간’을 의미하는 구석이라는 단어에는 마냥 밝은 이미지만 있는 건 아니니까.

어떤 이야기를 쓰면 좋을까. 소설가 손원평은 지난해 다른 작가들과 함께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여하게 되면서 도서전의 테마인 ‘믿을 구석’이라는 말을 음미했다. 구석이라는 단어 때문에 이야기를 약간 뒤틀어보자고 생각했다.
장편소설 ‘아몬드’로 일본서점대상을 수상한 손원평 작가가 관계가 균열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을 예리하게 포착한 두 번째 소설집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를 들고 돌아왔다. ⓒ표기식, 창비 제공
거의 모든 것이 연결돼 있는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믿을 구석을 가지고 있을 텐데. 일상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에서 믿을 구석은 무엇이 있을까. 사람 사이의 믿음, 신용? 생각해보면, 믿음이나 신용이라는 것도 얇고 아슬아슬하게 연결돼 있는 건 아닐까. 얼싸안고 어깨동무하는 관계가 아닌 손끝만 잡고 있는 관계, 언제든 손을 놓는 순간 완전한 타인이 될 수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건 아닐까. 뭔가 안 맞거나 틀리거나 더 이상 유용하지 않으면 손끝만 놔버리면 끝나는….

손원평은 서로가 서로에게 믿을 구석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순간 균열이 생기면 급격히 허물어지는 자본주의적 관계를 묘파한 단편소설 ‘당신의 손끝’을 발표할 수 있었다.

소설에선 문화센터에서 일하는 미술 강사 ‘효원’의 믿을 구석은 부유한 수강생 ‘주영’이고, ‘세탁소 할아버지’의 믿을 구석은 자신만의 화실을 열고 싶어 하는 ‘효원’이다. 효원은 자신을 열렬히 신뢰하고 응원하는 주영 덕분에 폐강 직전의 강좌를 지키고 자신만의 화실을 마련할 꿈을 꾼다. 하지만 친밀하다고 믿었던 둘의 관계는 계약과 소비의 논리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고, 효원은 비로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라는 건 실은 허약한 이해관계였음을 깨닫게 된다. 급기야 효원에게 시작된 믿을 구석의 붕괴는 세탁소 할아버지의 믿을 구석 붕괴로 이어지는데.

“‘약속했잖아요, 맘 안 바꾼다고. 잘못될 일 없다고. 내가 아가씨 하나 믿는다고 그렇게 얘길 했잖아요…. 이 낡은 가게에 이제 누가 또 들어와요. 우리 손주 놈은 이제 어쩌라고. 그 애 꿈은 오직 당신 손끝에 달려 있는데!’ 울다시피 소리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효원은 아득해졌다.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의 미래를 빼앗아버린 현실이 참혹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연결돼 있는 걸까. 우정이라고 생각했던 건 허약하디허약한 계약관계일 뿐이었다.”
손원평 작가가 문제작 ‘당신의 손끝’을 비롯해 단편 10편을 엮는 두 번째 소설집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창비)를 들고 돌아왔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열 편의 단편에는 문화센터와 호텔, 공부방, 명품 매장,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배경으로 자본주의 톱니바퀴 위에서 끊임없이 마모돼가는 현대인의 다채로운 표정이 담겨 있다. 소설집을 펼치면 해치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끝내는 누군가를 밀어내고 상처 입히게 되는 세계, 악인은 없지만 누구도 온전히 결백할 수 없는 세계가 선연히 펼쳐진다.

젊은 작가 손원평은 왜 자본주의 사회를 그려야 했을까. 그가 묘파한 후기 자본주의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작가의 여정은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손 작가를 지난 9일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서둘러 만났다.

―소설집을 여는 ‘당신의 손끝’의 효원과 주영 모두 문제적 인물인데.

“모든 작가가 그렇겠지만, 저는 인간에게 한 면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후기 자본주의는 사랑이나 감정, 이미지 등 자본 안에 포섭될 수 없던 것까지도 속속들이 자본이 뻗쳐나간 사회라고 할 수 있는데, 저는 주영을 이 시대의 대표적인 소비자라고 생각했다. 주영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소비를 하고 자신이 편하니까 강사 효원에게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한 푼의 납입이 없으면 깨어지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가게에 단골로 가다가도 어느 순간 안 맞으면 그냥 발길을 끊는데,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설집을 닫는 단편 ‘딸과 깍 사이’는 사무실의 기계적이고 무심한 일상 속에서 사소한 균열을 불러오는 파문을 그리고, 이를 통해 효율의 논리 아래 가려져 있던 인간적 감각이 되살아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뜨개질을 취미로 하는 회사 경리팀 소미는 희망퇴직 권고 리스트에서 평소 좋아하던 고객지원팀 선배 영림의 이름을 보게 되고 괴로워한다. 결국 월말이 되자 메일을 예약 발송하게 되지만, 내용을 잘못 첨부하면서 상황은 전혀 예상 밖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은 어떤 희망이 엿보이기도 하는데.

“소설집을 엮으려고 보니까, ‘피아노’ 같은 따뜻한 톤의 작품도 있지만, 대체로 차가운 톤의 한 방향으로 엮이는 것 같아서 소설집의 균형을 위해서라도 따뜻하고 희망적인 톤의 작품을 쓰려고 했다. 감정이나 영혼 없이 힘겹게 일하는 어떤 MZ세대 여성 인물을 떠올렸다. 하루하루는 좀 잿빛일지언정 마음속에선 꽃 한 송이 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예쁜 이름을 지어 주었고, 속으론 선배님 하면서도 겉으로는 무뚝뚝하게 하는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

1979년 서울에 태어나고 자란 손원평은 2016년 장편소설 ‘아몬드’로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서른의 반경’, ‘프리즘’, ‘튜브’, ‘젊음의 나라’ 등을, 소설집 ‘타인의 집’ 등을 발표했다. 특히 ‘아몬드’는 국내에서만 100만부 이상 팔렸고, 북미와 아시아, 유럽권 30여개국에 번역 수출됐다. 일본서점대상과 제주4·3평화문학상, 일본 니쿠텐코보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 영화계로 먼저 입문해, 장편 영화 ‘침입자’의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기도 했다.

―영화 제작에도 관여하고 있는데, 소설 쓰기와 영화의 관계는 어떠한지.

“대학 졸업 무렵, 영화를 만드는 게 재미있어서 하게 됐다. 영화와 소설은 창작을 한다는 면에선 같지만, 작업 형태는 전혀 다르다. 영화는 공동 작업이고, 소설은 개인 작업이다. 소설은 남이 인정하건 하지 않건 다 쓰면 완성이 된다. 지금은 아무래도 소설 쪽을 더 많이 하고 있다.”

새벽 1시 넘어 잠자리에 드는 그는 아침에는 조금 늦게 일어난다. 바닥에 있는 물건을 줍고 청소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은 간단히 먹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혼자 있는 시간에 부엌 테이블에서 글을 쓴다. 엉덩이가 아닌, 응축된 힘을 쏟아부어 쓴다. 오후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기도 하며, 멍 때리기도 하고, 산책도….

젊은 작가 손원평은 늘 관찰하고 생각을 굴린다. 늑대가 출몰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늑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찾아보고 관련된 인물을 찾아보거나 더 깊이 생각해본다. 그리고 넘어가고 잊어버린다. 만약에 그가 작가로서 대성한다면, 남들보다 이런 일을 많이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질문이 생기고 오래 남으면 펜을 든다. 스쳐 지나간 모습이나 뉴스와 사건, 잠깐 떠올리거나 상상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버무려져서 나오고. 그 들끓는 이야기의 숲 사이에서 효원과 주영 역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데….

“‘재미있다더니 왜 한순간에 끊어?’ 친구의 말에 주영이 음료를 홀짝이곤 입을 뗐다. ‘강사 니트가 너무 지루해.’ ‘니트? 니트가 지루하다고?’ 효원이 묻고 싶은 말을 그녀의 친구가 대신했다. ‘있어. 맨날 입는 단조롭고 따분한 격자무늬 니트가. 그리고 그 선생님이 쓰는 몇몇 단어들이, 좀 그래. 단단한 심지, 라든가 마음의 중력, 이런 식의 표현들.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듣다 보면 싫어지더라.’ ‘으휴, 너도 참. 근데 맞아. 항상 사소한 게 문제지.’ … 효원은 한참 동안이나, 울음이 다 그치고 눈물이 말라 누구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곳에서 나왔다. 해가 다 져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몹시 피로해 보였다. 분명 주영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라고 믿었는데 갑자기 진열대 위에 있다가 폐기 처분된 상품이 된 것 같았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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