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80> 봄의 파죽지세, 죽순

최원준 시인·음식문화칼럼니스트 2026. 4. 1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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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순결이 향긋하게 솟았네…아삭~ 봄의 생명력을 씹는 소리

- 외피 벗기면 뽀얀 속살 드러나
- 특유의 싱그러운 비린내 ‘은은’
- 맛 달고 식감 좋은 귀한 식재료

- 거제 죽순 곁들인 ‘생선 회무침’
- 대통밥 포함 ‘지리산 산채밥상’
- 기장 향토음식 ‘매집찜’ 등 별미
- 日·中서도 다양한 요리로 즐겨

우후죽순(雨後竹筍)과 파죽지세(破竹之勢). 대나무의 성정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면서도, 가장 흔히 쓰이는 고사성어들이다. 대나무의 기질을 잘 나타내는 말로서, 전자는 비 온 후 여기저기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죽순처럼 일시에, 곳곳에서 한꺼번에 전개되는 상황을 뜻하고, 파죽지세는 대나무를 결대로 자르면 단번에 쪼개지듯 거침이 없는 형국을 이르는 말이다.

대나무의 어린 싹 죽순은 1년 중 한 달 정도만 채취할 수 있는 귀한 봄 식재료이다. 맛이 달고 식감이 좋아 비빔밥 돼지고기볶음 장아찌 등 다양한 요리에 쓰인다. 사진은 죽순을 곁들여 만든 생선 회무침.


봄이 오면 이런 대나무의 거침없는 기세가 참 좋다. 그래서 이즈음의 대나무 숲으로 가끔 드는 것이다. 대나무숲에 들면, 우선 청량한 기운이 온몸으로 길을 낸다. 대숲은 정갈한 바람이 둥지를 트는 곳. 푸른 물길 위로 뿌리와 뿌리가 서로 얽히고설켜, 딛고 선 땅과 일체화하는 곳. 하여 대숲은 청정하면서도 우리네 집터를 굳건히 지키는 신성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나무는 예부터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곧은 선비의 정신에 비유되기도 했다. 그러하기에 대나무 숲을 걷다 보면 심신이 정화되고,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는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기도 한다.

▮봄에만 얻는 귀한 식재료

싹을 틔운 죽순.


4월쯤에서 늦게는 6월까지 넓은 대숲에는 20여m의 대나무가 한창 하늘을 찌를 듯 뻗어난다. 대나무 사이사이로는 죽순이 뾰족하게 고개를 내미는데, 마침 비라도 촉촉이 내리면 ‘우후죽순’이라 했던가? 대숲 여기저기서 죽순이 불쑥불쑥 제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대나무는 죽순으로 싹을 틔운 후 빠른 속도로 성장해 열흘 정도면 성체가 된다. 얼마나 빨리 자라면 죽순 외피를 채 벗지 못한 대나무가 사람 키를 훌쩍 넘는다. 오죽하면 ‘대나무 자라는 소리가 귓가에도 들린다’고 했을까? 이 때문에 1년 중 달포 정도만 채취할 수 있는 귀한 봄의 식재료 중 하나가 죽순이기도 하다.

경남 거제 하청면에 가면 맹종죽(孟宗竹) 대밭이 있다. 우리나라 맹종죽 시배지(始培地) 마을이기도 하다. 맹종죽은 사람 두 손아귀쯤의 굵은 대나무. 그래서 죽순도 굵고 크다. 지인의 대나무밭에서 죽순을 채취한다. 잘생긴 놈으로 골라 곡괭이로 한번 치니 죽순이 떼구루루 구른다. 단숨에 10여 개의 옹골진 죽순이 수북하게 쌓인다.

칼로 죽순 윗부분을 쳐내고 몸통에 어슷하게 칼집을 넣어주니, 한 번 만에 외피가 벗겨지며 뽀얀 속살이 수줍게 드러난다. 죽순 특유의 싱그러운 비린내가 은은하다. 여인의 살내 같기도 하고 아기의 젖비린내 같은 것이, 봄바람처럼 간질간질 사람 마음을 간질인다.

대나무 통 안에 밥을 지은 대통밥.


지인의 아낙이 죽순으로 만든 요리를 한 상 내어준다. 죽순 비빔밥에 죽순 돼지고기볶음, 죽순 숙회 등속이 넉넉하다. 맛이 달고 식감이 좋아 입에서 아삭아삭 죽순 씹는 소리가 청청하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맛본 죽순 요리의 기억은 다양하다. 여러 지역의 특성과 독특한 맛을 일별하던 추억이 쏠쏠했던 것. 경남 거제의 죽순을 곁들인 싱싱한 ‘생선 회무침’, 지리산 청학동 마을에서 대통밥과 함께 차려 낸 ‘지리산 산채밥상’, 전남 담양의 갓 데친 죽순을 새콤달콤한 초고추장에 버무려 무친 ‘죽순회’, 경남 합천의 어느 종갓집에서 받은 술상 위, 그윽한 솔향의 솔송주와 함께 곁들인 ‘죽순 장아찌’, 경남 밀양 천태산 자락의 지인 어머니가 보글보글 끓여낸 ‘죽순 된장국’….

동서고금에도 죽순 요리의 기록이 총총하다. 조선시대 서민의 복달임이었던 개장국에는 꼭 죽순과 고춧가루를 함께 먹음으로써 더위를 쫓고 허한 기운을 보충한다고 기록하고 있고, 여름철 입맛 없을 때 차고 시원하게 먹던 여름 물김치 중에서도 아삭한 식감과 시원함이 남다른 죽순 물김치가 으뜸이었다.

부산 기장군의 잔치 음식인 ‘매집찜’은 집안의 대소사나 잔치 등에 빠지지 않고 상에 오르는 향토음식 중 하나이다. 봄이면 흔히들 먹는 나물찜과 비슷한데, 청정바다를 끼고 있는 기장의 특성상 각종 해물과 더불어 갖은 채소와 나물들이 총동원되어 들어간다. 그중 봄철에는 기장 지역의 죽순을 따 매집찜에 함께 넣고 조리해 먹는다.

봄철 죽순과 더불어 대나무에서 취한 수액 또한 건강식품으로 귀하게 쓰인다. 대나무는 물을 지하 70m에서부터 끌어올릴 정도로 물관의 힘이 좋고 수액이 많아, 땅 위 20m 위 줄기 부분을 비스듬히 끊어 비닐에 묶어 두면 하루에 2ℓ 정도의 수액을 채취할 수가 있다. 대나무 수액은 고로쇠보다 더 영양 성분이 높고 인체에 유익하다고 전해진다.

▮일본 중국서도 사랑받는 식물

죽순을 넣은 비빔밥.


죽순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널리, 즐겨 먹는 봄철 식재료이다. 일본에서 대나무는 번성함, 강한 생명력, 고결하고 순수함을 상징하는 식물이다. 새해 첫날 대문 앞에 복을 비는 소나무, 대나무 장식인 카도마츠(門松)로 활용하기도 하고, 신사 주변에 심어 악귀를 막는 신성한 식물로 여기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대나무를 강직함 지조 절개 겸손을 상징하며 군자나 현자에 비유되는 고귀한 식물로 여긴다.

일본에서는 죽순을 ‘타케노코(竹の子)’라 하는데, 일본에서의 타케노코 요리는 봄철을 대표하는 미각으로, 아삭한 식감과 은은한 향을 즐기는 계절 음식이다. 쌀뜨물에 삶아 아린 맛을 제거한 후, 간장 미림 등으로 간을 하여 지은 죽순밥(타케노코 고항), 쯔유, 다시마 육수 등에 졸여낸 죽순조림(타케노코 니모노), 바싹하게 튀겨낸 죽순튀김(타케노코 텐푸라), 죽순을 구워 간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는 죽순구이(야키 타케노코), 갓 채취한 죽순을 데쳐 얇게 저민 후 와사비 간장에 찍어 먹는 죽순회(타케노코 사시미), 일본 된장으로 끓여낸 죽순 된장국(타케노코 시로미소국) 등 다양한 방식으로 즐겨 먹는다.

죽순을 무친 나물.


중국에서는 죽순을 ‘주쑨(竹笋)’이라 부르며, 아삭한 식감과 독특한 향의 죽순 요리를 ‘식탁 위의 귀물(貴物)’이라 부르며 즐겨 먹는다. 대표적인 죽순 요리로는 죽순을 담백하게 볶아낸 죽순 볶음(淸炒竹筍, 청차오주순), 고기와 볶아낸 죽순 고기볶음(竹筍炒肉, 주순차오러우), 채 썬 돼지고기에 어향소스를 곁들인 위샹러우쓰(魚香肉絲) 등이 있다. 식이섬유가 풍부해 튀김이나 볶음 등 기름진 중국 음식에 잘 어울리는 식재료로 사랑받고 있다.

이렇듯 봄이면 다양한 국가, 여러 지역에서, 그들 방식으로 널리 먹던 죽순 요리. 대나무의 강한 생명력과 청정, 순결함을 오롯이 가지고 순을 틔운 죽순이기에, 이 죽순 요리를 먹음으로써 봄의 푸른 기운을 제대로 느낄 수가 있겠다.

대숲을 걷는다. 함께 뒤따르던 바람이 푸른 물결 소리로 찰박찰박 대숲으로 철썩인다. 경전을 읊듯 조곤조곤 낮은 소리로, 삼라만상의 가슴을 다독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대숲에 들면 명징한 평화로움이 그윽하다. 그렇게 백 년의 세월을 살아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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