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처럼 보여야 해!

이문영 기자 2026. 4. 14.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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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영의 당신은 소설] 17_뚜안 친구 수영 ②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수영(가명·26) 할머니의 집과 뚜안 할머니의 집은 베트남 호찌민공항을 사이에 두고 차로 30분 거리였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남북으로 길이 갈라졌다.

뚜안이 할머니 집(호찌민 북부 고법군)에서 태어난 것처럼, 수영도 할머니 집(고법군 남부와 접한 푸뉴언군)에서 세상에 왔다. 뚜안이 할머니와 살면서 한국에 일하러 간 부모를 그리워한 것처럼, 수영도 할머니의 돌봄을 받으며 한국에서 일하는 부모의 부재를 견뎠다. 뚜안은 엄마 아빠가 일하는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수영은 한국으로 귀화한 엄마 아빠를 따라 한국에서 살았다. 한국 정부의 합동단속 중 추락사(지난해 10월28일)한 뚜안이 호찌민공항 북쪽의 할머니 집으로 돌아갔을 때, 뚜안의 영혼을 베트남으로 데려가 49재를 치러준 수영은 공항 남쪽 할머니 집을 들러 한국으로 돌아왔다.

뚜안은 죽었고 수영은 살았다. 둘(2000년생 동갑)의 시간이 어디에서 겹치고 어디서 갈라졌는지 수영은 문득 생각했다.

베트남에서 ‘어린 수영’은 밝은 아이였다.

한국에서 유학 중이던 아빠와 한국에서 이주노동 중이던 엄마는 한국에서 만나 한국에서 결혼했다. 베트남으로 돌아와 수영 자매를 낳고 다시 한국으로 일하러 갔다. 부모와 떨어져 살았지만 수영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웃음도 많고 친구도 많았다. 한살씩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 아빠의 ‘없음’은 커졌다. 친구와 싸워도 품에 안겨 칭얼댈 아빠가 없었고, 몸이 자라는 여자아이의 고민을 알아줄 엄마도 없었다. 할머니의 사랑도 부모의 잔소리를 대체하진 못했다. 한국에 와서 같이 살자고 했을 때 수영은 없던 엄마 아빠가 생기는 것처럼 기뻤다.

이렇게 추운 나라도 있구나.

11살에 더운 베트남에서 건너왔을 때 수영은 2월의 한국이 그토록 차가울 줄 몰랐다. 7년 뒤 대구에서 친구가 된 뚜안은 한국이 추워서 좋다고 했다. 한국의 많은 것들을 좋아했지만 변화가 뚜렷한 사계절을 가장 좋아했다.

와, 한국어 너무 잘한다.

한국인들의 한국어 실력도 수영을 놀라게 했다. 안녕하세요? 얼마예요? 베트남에서 더듬더듬 따라했던 한국어를 한국 사람들은 너무 빠르고 유창하게 구사했다.

“안티팬이니?”

등교를 준비하며 수없이 연습했던 “안녕”을 건네면 그 말이 따라왔다. 그때 처음 들은 단어를 수영은 피터팬 같은 걸까 추측했다. 말의 맥락을 이해하기에 한국 초등학생들의 한국어는 너무 빠르고 유창했다.

안티라고 해서 팬이 못될 까닭은 없었다. 안티. 베트남에서 할머니가 불렀고 지금도 집에서 부모님이 부르는 이름이었다. 안티가 한국 이름을 직접 ‘수영’(실명은 ‘엑소’의 한 멤버 이름에서 따옴)이라고 지은 이유도 베트남에서부터 한국 아이돌그룹의 팬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이 가난하구나.

수영은 그 사실을 한국에 와서 알았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베트남에서 궁핍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대부터 살아온 집이 있었고 부모가 한국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생계도 쪼들리지 않았다. 한국에 왔더니 집이 없었다. 가게에 딸린 단칸방에서 이제 한살 된 동생이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었다. 수영과 엄마 아빠와 세 동생(베트남에서 같이 입국한 둘째와 이후 출생하는 넷째까지)이 작은 방 하나에 살았다. 둘째 동생은 매일 밤 엄마 친구 집에 가서 자고 왔다. 베트남에선 부모와 떨어져 지낸 시간이 힘들었는데, 한국에 오니 내 공간 없이 붙어 지내야 하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이상하거나 신기하거나.

학교에선 한 아이가 계속 수영을 노려봤다. 딱히 괴롭히진 않았으나 그들 ‘안’에 끼워주지도 않았다. 이상하게 보지 않으면 신기하게 봤다. 발표 때 서툰 한국말로 쩔쩔매면 사방에서 웃음이 보글거렸다. 부모님은 일하느라 바빴다. 같이 살아도 떨어져 살 때처럼 수영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매일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꿈을 꿨다. 엑소 좋아하는 친구를 초등학교 졸업 즈음 만나면서 겨우 마음을 붙일 수 있었다.

“시끄러워. 여기 한국이야.”

부모님이 일하는 식당은 시장 안에 있었다. 엄마와 베트남 말로 대화하고 있으면 시장 할머니들이 “여기서 베트남어 쓰지 말라”며 화를 냈다. 수영의 한국어가 능숙해질수록 말에 얹힌 편견과 차별을 알아듣는 순간이 왔다. 내가 외국인이라고 저러나.

“베트남 사람이면서 왜 나보다 공부 잘해?”

중학생 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지는 친구들이 있었다. 내가 베트남인이어서 그렇구나. 베트남 사람은 당연히 너보다 공부를 못해야 하는구나.

“얼마야?”

고등학생 시절 휴대전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술 취한 할아버지가 들어와 교복을 입은 수영에게 물었다. 수영은 휴대전화 가격을 묻는 줄 알았다. “너 얼마냐고?” 공장이든 상점이든 한국인 노동자는 찾아볼 수 없는 동네였다. 할아버지가 술 냄새를 뿜으며 수영에게 손을 뻗었다. 수영이 휴대전화를 집어 던졌다. “나가요.” 한국말로 소리를 질렀다. “나가라고.” 놀란 할아버지가 한국인인 줄 몰랐다는 얼굴로 도망쳤다. 한국인이 아니면 이래도 되는구나.

수영은 한국인이었다.

딸들을 한국으로 부르기 전 엄마 아빠는 귀화 절차를 마친 상태였다. 수영과 동생도 입국 이듬해 국적을 얻었다.

말도 생김새도 구별되지 않아 정말 한국인이 됐다고 느낄 때조차 구별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덜컹거렸다. 수영이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에 지원했을 때 대학에서 수영(한국어교육학과 전공)을 지도했던 교수는 추천서를 써주지 않았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프로그램에 적합하지 않다고만 했다. 수영은 한국 대학에서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지원 자격에 ‘한국 원어민’은 없었고 ‘파견 국가 언어 가능자’는 우대사항이었다. 한국어에 능통한 베트남 태생의 한국 국적자가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왜 적합하지 않은지 수영은 지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같이 지원한 한국 출생 친구만 추천서를 받았다. 오래 준비해온 일들이 좌절(현재 국내 베트남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프리랜서)될 때면 억지로 가라앉힌 찌꺼기를 발로 찬 것처럼 의문들이 부스스 떠올랐다.

뚜안과 나는 무엇이 달랐을까.

뚜안이 죽기 전까지 수영은 친구가 한국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뚜안은 미등록이 아니었으니까. 뒤늦은 질문들이 수영을 발로 찼다.

뚜안과 나는 같은 베트남인이었을까. 한국 국적이 있고 없음이 삶과 죽음을 가를 만큼 큰 차이였을까. 나는 같은 한국인일까. ‘우리’ 안에 ‘너희’는 없다고 믿는 한국인들과 나는 무엇이 다를까. 베트남에서 태어나 11살까지 살았던 나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두 동생은 같은 베트남인이고 같은 한국인일까.

뚜안 사망 뒤 수영은 한국이 부쩍 무서워졌다. “내 친구 뚜안을 살려내라”며 공단의 외국인 친구들이 집회를 열고 행진을 해도 뚜안이 6년을 다닌 대학은 조용했다. 추모 성명 한장 붙지 않았고 장례식에 온 한국인 학생도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평온했다.

외국인들에겐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뚜안 추모제에서 경찰을 보자마자 자리를 뜬 외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비자가 있어도 그랬다.

수영의 외국인 친구들은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휴대전화를 열어 밤사이 죽은 외국인이 없는지부터 확인했다. 외국인이 시끄럽다고, 담배를 피운다고,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고, 어떤 한국인들은 신고했다. 신고 이유는 달랐다. 여기 불법체류 외국인 있어요! 수영의 친구를 보자마자 ‘헤드록’을 걸고 경찰에 신고한 남자가 있었다. 출동한 경찰이 ‘합법 체류’를 확인했지만 남자는 사과하지 않았다. 체류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경찰도 아니면서 ‘자국민을 보호한다’며 불심검문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무턱대고 다가와 ‘돈을 주면 신고하지 않겠다’며 협박하는 중학생들까지 생겼다. 공장에 들이닥친 단속반은 비자도 보지 않고 수갑부터 채웠다. 여기 불법체류 외국인 있어요! 언제부턴가 이 말 한마디면 혐오하고 차별하는 내심까지 덮을 수 있었다.

“한국 사람처럼 보여야 해.”

수영은 친구들에게 조언했다. 여자라면 굳이 할 필요 없을 때도 화장을 시켰다. 밖에 나갈 땐 한국인처럼 화장하고 입을 열지 말라고 했다. 남자에겐 학교 재킷을 빌려줬다. 공장 출퇴근 길에 주목받지 않길 바랐다.

외국인 티 내면 안 돼.

운전대를 잡은 수영의 손이 긴장했다. 한국인 수영조차 멀리서 경찰만 보여도 몸이 굳었다. 자동차에 미등록 친구들이 있을 땐 특히 신경이 곤두섰다. 베트남어로 하던 대화를 멈추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베트남 음악도 껐다.

외국인은 잘못한 일이 없어도 신분증 검사를 받았다. 한국에서 외국인은 미국인이나 영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니었다. 경찰이 수영의 차를 세웠다.

나는 한국인이다….

수영이 창문을 내리며 혀에 집중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발음이어야 했다.

“왜 그러시는데요?”(☞18회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묻는다면’)

이문영 | 이슈팀 기자. 책 ‘웅크린 말들’ ‘노랑의 미로’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루카스’ 등을 썼다. 세기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진 못해도 누구든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小說)의 주인공은 될 수 있다. ‘이야기의 자격’을 인정받은 적 없는 이야기들이 글이 되고, 읽히고, 연결될수록 언어와, 기록과, 서사의 틈들도 조금은 메워질 것이라 믿는다. 부끄러운 것이 많다.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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