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전심] ‘경력보유여성’이라는 달콤한 이름, ‘경력 산정’은 어떻게 할 거죠?

이재은 2026. 4. 14.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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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력단절여성이 아니라, 경력보유여성인데요?"

최근 서울시 성동구를 시작으로 전국 여러 지자체에서 '경력단절여성(경단녀)'이라는 단어를 '경력보유여성'으로 바꾸는 조례 개정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단절'이 주는 차갑고 부정적인 꼬리표를 떼어내고, 출산과 육아의 시간을 사회적 가치를 일궈낸 새로운 '역량 형성기'로 보겠다는 따뜻한 시선을 적용한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반갑고, 어쩌면 진작 그랬어야 할 당연한 변화입니다.

하지만 수년간, 지자체 산하 여성 고용 전문기관의 대표로 현장의 수많은 채용 현장을 지켜봐 온 필자의 마음은 조금 복잡합니다. 이름표는 세련되고 예뻐졌는데, 정작 그 안을 채울 실질적인 알맹이, 즉 경력단절 여성들의 새로운 역량을 제대로 측정하고 산정할 수 있는 기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겉포장은 근사하지만 막상 뜯어보면 질소만 가득한 과자 봉지를 들고 있는 듯한 불편함이랄까요?

현장에서 만난 여성들의 목소리는 이미 정책보다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어린이집 학부모 임원을 맡아 갈등을 중재하는 리더십을 배웠어요."

"공백기 동안 영상 편집을 익혀 구독자 3천 명의 유튜버로 활동하며 콘텐츠 기획력을 키웠습니다."

경단녀로 불리던 여성들은 돌봄의 시간 속에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줄곧 성장해 왔고, 이 시간을 채용할 기업의 언어로 변환하는 감각까지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 '보이지 않는 성장'을 고용기관은 어떤 저울로 재서 얼마만큼의 경력으로 인정해 줄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채용은 공정하고, 합리적이어야 하기에 '육아도 경력이다'라는 공감의 구호만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해결되지 못합니다. 지자체장의 이름이 들어간 경력인정서를 발급해 지자체 산하 공공기관 등 극소수의 기관에서만 돌봄노동이 부분적으로 경력화되는 방식으로는, 육아·돌봄 기간 형성된 역량이 시장의 경력으로 온전히 편입될 수 없습니다. 지자체마다 경력보유여성에 대한 정의가 다르고 경력 인정의 접근법이 제각각인 점은 더 큰 문제입니다. 실례로 일부 지자체는 용어만 '경력보유여성'이라 칭할 뿐, 실무적으로는 기존 경력단절여성의 정의를 그대로 답습한 채, 육아와 돌봄 경험은 경력으로 인정하지 않고 공백기 내에 쌓은 새로운 학습 이력만을 경력으로 산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도 합니다.

구체적인 경력 인정 기준과 경력 산정 모델 설계 없이 '경력보유여성' 용어의 확산과 육아·돌봄 활동의 경력 인정제는 또 다른 '공정성'의 리스크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육아와 업무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직장 내 자리를 지켜온 워킹맘들의 날 선 목소리가 그 시그널입니다.

"육아를 경력으로 산정하면, 육아하며 일해온 나는 '경력 더 보유 여성'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이 없다면, 불붙듯 번지고 있는 지자체의 조례 개정은 보여주기식 이벤트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어떤 이름이 더 적합할까의 패러다임을 지나 육아·돌봄기 동안 여성들이 새로 형성한 역량 전반이 변화된 직무에 얼마나 적합한지를 제대로 계산할 수 있는 모델 마련을 논의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이미 지속적인 재학습(Reskilling)과 숙련향상(Upskilling)이 경력 유지에 필수인 시대에서, 단순히 얼마만큼 육아·돌봄에 전념했느냐로 경력을 산정하는 방식은 이미 오래된 프레임 아닐까요? 현직에 있어도 재학습이 멈추면 경력단절이 발생되고, 공백이 있더라도 필요한 학습과 기술로 채웠다면 실질적인 경력보유자가 될 수 있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육아·돌봄 과정에서 얻은 소통 능력이나 위기 대응력 같은 '소프트 스킬'이 희망 직무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공백 기간 동안 새로 연마한 특정 스킬은 변화된 직무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경력산정모델과 지표의 표준화입니다.

더불어, 이를 기반으로 공정한 AI 채용 시스템을 구축하여 민간 기업의 인사 시스템과 연결하는 적극적 조치들도 필요합니다. AI 알고리즘이 육아·돌봄 기간을 경력 부재자로 읽고 서류에서부터 이들을 떨어뜨리는 데이터의 편향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육아·돌봄도 경력이다'의 외침을 넘어 육아·돌봄 경험' 중 어떤 활동이 기업의 역량 범위와 매칭되는지 데이터화하고 동시에 경력공백 기간 습득한 지식과 스킬의 최신성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공백을 상쇄할 구체적인 방법론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출산과 육아를 선택한 여성들의 숨은 역량을 제대로, 그리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시스템이 안착할 때 비로소 '경력보유여성'이라는 이름은 진짜 자부심이 될 수 있을테지요. 그때쯤이면 경력보유여성이라는 낯선 이름 자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새로운 경력자들의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재은 중부대학교 학생성장교양학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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