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은 ‘하얀 전쟁’,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블랙머니’, ‘소년들’ 등 40여 년간 한국 사회의 이면을 꿰뚫어 온 리얼리즘 영화의 대부 정지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첫 제주 4·3 상업영화다. 1949년과 1998년, 현재에 이르는 세 개의 시점을 교차하며 비극의 참상을 묵직하게 담아내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 본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내 이름은’ 스틸컷
1998년의 봄. 촌스러운 이름이 인생 최대의 콤플렉스인 18세 소년 ‘영옥’(신우빈)은 어쩌다 서울에서 전학 온 ‘경태’의 눈에 들어 난생처음 반장 완장을 차지만, 결국 꼭두각시로 전락해 교실 안의 폭력을 무기력하게 방관하고 만다. 한편, 손자뻘인 아들 영옥을 홀로 키워낸 어머니 ‘정순’에게도 지독하게 아팠던 1949년의 봄이 다시 찾아온다.
서울에서 새로 온 의사의 도움을 받아 까맣게 지워져 있던 어린 시절의 파편들을 하나둘 맞추기 시작하는 정순. 분홍색 선글라스를 끼고 하얀 차에 올라 제주의 곳곳을 누빌수록, 반세기 넘게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그날의 슬픈 약속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영화 ‘내 이름은’ 스틸컷
영화는 촌스러운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싶은 소년(영옥)과 까맣게 잊힌 1949년 제주의 아픈 기억을 되찾으려는 어머니(정순)의 숨 막히는 궤적을 쫓는 과정을 담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깊고 아득한 상흔으로 남은 제주 4·3사건을 대중 상업영화의 화법으로 정면 돌파한 첫 번째 작품이다.
특히 과거의 참상을 평면적으로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1948년 비극이 태동하던 그해 봄부터 18세 소년 영옥의 1998년, 그리고 긴 세월을 지나 어른이 된 현재까지 총 3개의 타임라인을 치밀하게 직조해 낸다.
영화 ‘내 이름은’ 스틸컷
마침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후, 일렁이는 보리밭에서 목에 두른 스카프를 쥐고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추는 정순의 춤은 경건하게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특히 그가 극중 한시도 벗지 않는 ‘분홍색 선글라스’는 과거 학살의 현장에서 쏟아지던 눈부신 햇빛에 대한 지독한 트라우마이자, 끔찍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처절한 방어 기제를 상징하는 소재다.
역사의 거대한 폭력 앞에 무력하게 짓밟힌 절대적 피해자임과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또는 무지함으로 인해 타인에게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가해자로서의 정순의 모습은 제주 4.3을 소리 높여 외치지 못했던 제주도민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영화 ‘내 이름은’ 스틸컷
‘폭싹 속았수다’에서 투박하고 강인한 제주 해녀의 얼굴을 보여줬던 염혜란은 이번 작품에서 아들과 친구처럼 다정하게 교감하면서도 남모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무용 교사 ‘정순’으로 분해 애틋하고 깊이 있는 모자 서사를 써 내려간다. ‘영옥’ 역의 신우빈 배우는 첫 영화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또래보다 나이 많은 엄마를 부끄러워하는 소년의 방황과 성장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자신의 이름이 너무나 싫었던 18세 소년 영옥이 어머니가 애써 감춰둔 시린 진실을 마주하며 단단하게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붉힌다.
영화 ‘내 이름은’ 스틸컷
영화는 각기 다른 모양의 폭력에 굴복했던 모자가 긴 시간을 돌아 마침내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연대하며 진정한 자신의 ‘이름’과 자아를 되찾는 과정을 눈부시게 그려낸다. 이데올로기적 접근을 넘어, 비극적인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들의 일상을 연대와 치유의 시선으로 어루만지는 영화다. 러닝타임 11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