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프이스트-김성훈의 지속 가능한 공간] 두 개의 성지, 그리고 전쟁

2026. 4. 14.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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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유발하라리 사피엔스 중_출처:김성훈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다시 펼친 것은 순전히 궁금증 때문이었다. 뉴스를 볼 때마다 드는 질문 하나. 인간은 왜 이렇게 맨날 싸우는가. 이란과 이스라엘, 미사일과 핵시설, 호르무즈 봉쇄와 수천 명의 사망자. 이 싸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수천 년째 같은 땅에서, 같은 이유로 반복된다. 나는 그 본성을 이해하고 싶었다.

하라리는 책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호모 사피엔스는 왜 지구를 지배하게 됐는가. 더 힘이 세서도, 더 빠르거나 영리해서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함께 믿는 능력' 때문이었다. 국가를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물리적으로 어디에 존재하는가. 땅도 있고 사람도 있지만, '대한민국'이라는 개념 자체는 우리가 함께 믿기로 약속한 것이다. 화폐도 마찬가지다. 지폐 한 장은 그냥 종이지만, 모두가 그 가치를 믿기 때문에 실제로 작동한다. 종교도, 법도, 인권도 따지고 보면 모두 그렇다. 하라리는 이것을 '상상의 질서(Imagined Order)'라고 불렀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수십억 명이 함께 믿기 때문에 실재하는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갖는 것.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이 상상의 질서들이 서로 충돌해 온 역사라고.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역사가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증거는 없다. 문화에 따라 무엇이 선인지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를 판단할 객관적인 척도는 우리에게 없다."
역사에는 정의가 없다. 이 문장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책을 덮지 못했다.

공간을 기획하고 설계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언제나 이 질문을 먼저 한다.
이 장소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그 땅을 그 땅이게 하는가.
역사와 지리와 사람이 층층이 쌓인 맥락을 읽지 않고서는 어떤 공간도 제대로 만들 수 없다.
그 눈으로 이 전쟁을 바라보면, 두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 자체가 이미 갈등의 구조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스라엘은 경기도보다 조금 큰 땅 위에, 사방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들로 둘러싸인 채 존재한다. 포위된 땅 위에 사는 사람은 두려움 속에서 판단한다. 그 두려움이 핵무기와 선제 타격 독트린을 낳았다. 이란은 그 반대편에 있다. 중동·중앙아시아·남아시아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세계 원유 운송의 20퍼센트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을 남쪽에 품고 있다. 이 전략적 위치는 직접 싸우지 않고도 세계 경제를 흔들 수 있는 힘을 준다. 두 나라는 처음부터 서로를 자극할 수밖에 없는 공간 위에 놓여 있었다. 지정학은 운명은 아니지만, 조건이다. 그리고 그 조건 위에 역사와 종교가 쌓이면서, 갈등은 단순한 국가 이익의 충돌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되었다.

그 무언가의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다.

3천 년의 시간이 단 몇백 미터 안에 수직으로 쌓여 있는 이 도시는, 인류가 공간에 얼마나 깊은 의미를 부여해 왔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성전산 위에는 이슬람의 황금 돔이 서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하늘로 승천했다고 믿어지는 바위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그 성전산 서쪽 외벽 아래, 지금도 유대인들이 이마를 대고 기도를 올리는 곳이 통곡의 벽이다. 솔로몬 성전이 바빌론에, 다시 로마에 의해 무너진 자리 — 그 잔해의 벽 앞에서 유대인들은 2천 년을 울었다. 그리고 바로 그 동일한 바위 위에 언젠가 제3 성전을 세우겠다는 믿음이 지금도 살아 있다.

같은 바위, 같은 땅, 두 개의 절대적 믿음. 한 자리에 두 개의 집을 동시에 지을 수는 없다. 지속가능한 공간의 첫 번째 조건은 공존이다. 배제하도록 설계된 공간은 반드시 언젠가 폭력으로 돌아온다. 예루살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지속불가능한 공간이다.

가톨릭 신자인 내게 이 전쟁은 단순한 지정학적 분쟁 이상으로 읽힌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이 세 종교는 모두 아브라함이라는 동일한 조상에서 출발한다. 같은 하나님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며, 다른 방식으로 믿는다.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통해 언약이 계승됐다고 말하고, 이슬람은 첫째 아들 이스마엘이 진정한 상속자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그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됐다고 믿는다. 같은 아버지, 같은 사건, 완전히 다른 해석. 세 종교가 예루살렘을 동시에 성지로 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같은 뿌리에서 자란 세 나무가, 같은 공간을 차지하려 수천 년을 다퉈 온 것이다.

바로 여기서 하라리의 '상상의 질서'가 가장 선명하게 작동한다. 이스라엘은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약속한 땅"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다. 이란은 "예루살렘 해방은 이슬람 전체의 신성한 의무"라는 믿음 위에 서 있다. 두 믿음 모두 수천 년의 역사와 경전과 신앙으로 단단히 뒷받침된다. 각자의 질서 안에서 모두가 완벽하게 정의롭다. 그래서 이 전쟁이 협상 테이블에서 끝나지 않는 것이다. 땅과 자원을 두고 싸우는 전쟁은 조약으로 끝낼 수 있다. 그러나 수천 년의 믿음이 충돌하는 전쟁은, 그렇게 간단히 봉합되지 않는다.

그 한복판에서, 역사상 첫 미국 출신 교황 레오 14세가 자국 대통령의 전쟁을 향해 말했다. "하느님은 어떤 전쟁도 축복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누구도 오늘 폭탄을 떨어뜨리는 자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 가톨릭 신자로서 나의 교황이 한 이 말은, 어느 상상의 질서에도 속하지 않은 자리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그래서 트럼프도 네타냐후도 그 말을 무시했다. 자신의 믿음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좀처럼 귀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사피엔스》를 읽으며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결국 이것이었다. 인간은 왜 이렇게 맨날 싸우는가. 그리고 나는 답을 얻은 것 같기도 하고, 더 깊은 물음 앞에 서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은 믿기 때문에 싸운다. 그 믿음이 너무 강하고, 너무 오래되었고, 너무 깊이 공간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한 지붕 세 종교, 예루살렘 통곡의 벽_출처:한겨레 신문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과 바위 돔은 수천 년 동안 단 몇 미터를 두고 나란히 서 있다. 같은 바위를 두고,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한다. 이 장면이 내게는 이 전쟁의 본질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읽힌다. 건축가로서 나는 공간이 단순히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믿음과 역사와 욕망이 굳어진 것임을 안다. 그래서 이 전쟁은 군사력으로 끝낼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상상의 질서가 충돌하는 한, 전쟁은 형태를 바꿔 가며 반복될 것이다.

이 전쟁을 이해하는 가장 정직한 출발점은 "누가 악인인가"를 찾는 것이 아니다. "왜 서로가 이토록 정의롭다고 믿는가"를 묻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이야기다. 그러나 패자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같은 자리에서 수천 년을 버텨 온 두 개의 성지가 오늘도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김성훈 지음플러스 대표,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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