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만 온다던데"…회색도시가 자꾸 생각나는 이유 [박은새의 유별난 브랜딩]

박은새 2026. 4. 1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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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더와 커피의 매력, 시애틀-스러움

안개가 자욱했고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건축 수업에서 텍스트로만 접하던 도시, 시애틀에서 마주한 첫 풍경이다. 떠나기 전 지인들이 건넨 말은 하나같이 회의적이었다. “먹을 게 없다”, “볼 게 없다”, 그리고 “예쁘긴 한데 비가 안 올 때만 그렇다”는 식이었다.

실제 3월임에도 해가 없는 길고 긴 겨울의 울적함이 도시를 온통 덮고 있었다. 하지만 첫인상의 서늘함과 달리, 거리를 깊숙이 걸을수록 이 회색빛 도시에 대한 편견은 안개처럼 조금씩 흐려졌다.

 흐린 날씨가 주는 낭만

도시의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오래된 아파트를 개조한 숙소는 어두침침하게 느껴졌다. 눈에 보이는 난방 온도계를 모두 올려놓고 도보 3분 거리의 파이크 플레이스로 나섰다. 미국 전국구 차우더 경연에서 17번이나 1위를 했다는 파이크 플레이스 차우더 가게 앞 늘어선 줄을 보는 순간 울상이 되어버렸다. 뉴잉글랜드 스타일 차우더가 왜 시애틀에서 유명할까 하는 의구심이 앞섰다. 대부분 관광객으로 북적여보여 우려가 됐지만 다른 선택지를 고민할 처지가 아니었다.

시그니처 메뉴인 뉴잉글랜드 클램 작은 사이즈, 그리고 또다른 인기 메뉴인 씨푸드 비스크는 사워도우 빵 안에 담아주는 브레드 볼로 주문했다. 보스톤에서 살았었지만, 차우더하면 짜고 느끼한 크림에 소량의 질긴 조개가 비실비실하게 담겨있다는 기억뿐이다.

된장찌개에서 끓고있는 조개를 구매한 곳이 수산시장인지 마트인지를 후각으로 식별하는 피를 물려받아 해산물의 신선도에는 예민한 편인데, 합격이다. 시판 조개 육수의 짠맛이 아니다. 부드럽게 진한 맛의 차우더 한 입에 갑자기 시애틀의 우중충한 매력에 흠뻑 빠졌다. 으스스한 날씨와 뜨거운 스프의 조합. 클래식하다. 추우니까 당연히 더 맛있다.

따끈한 차우더를 품은 사워도우 브레드 볼, 시애틀의 쌀쌀한 공기를 녹이는 한 끼 / 사진. ⓒ박은새

차우더가 담긴 사워도우 안쪽은 따뜻하고 축축하다. 단단하고 건조한 겉면과 훌륭한 조합이다. 사워도우의 은은한 산미는 차우더의 헤비크림, 버터 베이스의 크리미한 맛과 잘 어울린다. 관광지 한가운데서 타지역 메뉴를 시그니처로 계속 팔고있다. 속이 뜨끈해지고나니 맛은 좋지만 가격이 사악하다고 후기가 달린 랍스터롤 샌드위치도 궁금해졌다.

 커피가 맛있는 이유

100V 전압이라 미국행에 최적인 전기장판의 온기를 박차고 일어났다.  7시면 오픈하는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일처리를 하고 앉아있으니 하루만에 로컬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마침 푸디를 위한 여행앱 '시애틀 가이드'에서 추천한 Anchorhead Coffee가 숙소 근처다.

Burnt Honey를 비롯한 직접 만든 수제 시럽들의 유혹을 이겨내고 순수한 아이스라떼 한 잔을 선택했다. 근처엔 블럭마다 로컬 카페가 있는데, 직접 볶거나 지역 로스터리 원두를 사용한다. 흐린 날의 쓸쓸하고 삭막한 분위기를 뚫고 나오는 신선함과 에너지가 있다.

시애틀의 흐린 아침, 로컬 카페에서 마시는 순수한 아이스 라떼 한 잔 / 사진. ⓒ박은새

다음 날은 벨타운(Belltown)쪽 Fulcrum Coffee Roasters에서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인 크림 오브 피스타치오(Cream of Pistachio)를 선택했다. 카페인 섭취는 오전 9시 전에만 하는지라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카페가 매우 반갑다.

시애틀에선 이른 아침부터 도시 전체가 스페셜티 커피를 소비하는 것처럼 보인다. 100년이 넘은 보잉사, 80년대 마이크로소프트부터 90년대 아마존, 그리고 메타, 구글 엔지니어링 센터까지 이어지는 도시다. 고연봉 테크 종사자들이 이 커피를 마신다.

 시애틀라이츠의 하루는 어떨까

시애틀에선 왜 카페 문화가 발전했을까. 너바나의 고향이자 스타벅스가 시작된 이곳은 일년에 절반이 흐리다. 자연스레 실내 활동이 늘고, 카페 문화를 비롯한 인디 음악, 그런지 음악의 발원지가 될 수 있었다. 날씨가 거칠수록 바깥으로 향하는 감각이 줄어든다. 대신 몰입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시애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유독 밀도 있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시애틀스러움'이 지리적 환경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시애틀에 위치한 아마존 본사의 랜드마크인 '아마존 스피어스(The Spheres)' / 사진. ⓒ박은새

시애틀라이츠(seattleites·시애틀 사람을 일컫는 말)들은 비 오는 날 일부러 하이킹을 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웃도어 의류 매장들이 도심 곳곳에 있다.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으며 벨타운의 상징적인 랜드마크가 된 아마존 스피어를 지나 홀푸드에서 장을 보고 요가원으로 향했다. 적당히 따뜻한 온도, 이머시브 비주얼과 음악으로 힙한 분위기의 대형 스튜디오에서 30여명의 로컬들과 몸을 움직이니 한층 더 시애틀라이츠가 된 느낌이다. 

시애틀의 랜드마크인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 / 사진. ⓒ박은새

 산, 바다, 호수가 모두 있는 시애틀

드디어 해가나고 상큼해진 기운과 맑아진 시야 너머로 설산이 보였다. 캐스케이드 산맥 쯤 되나보다. 도심에 산, 바다, 호수가 공존한다. 유사한 지형을 가진 속초와 고성의 매력에 빠졌던 것처럼,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르게했던 시애틀이 달리 보였다.

사계절 흐리고 습기 가득한 기후 덕분일까. 파타고니아 여행 이후 피부에 역대급 윤기가 돈다. 조금 개기 시작한 날씨 덕분에 관광객 모드가 되었다. 스페이스 니들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온다. 도심 산책을 시작하려다 자욱한 연기를 뿜어내는 핫도그 푸드트럭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황급히 검색해보니 놀라 핫도그(Nola Hot Dogs)다. 오너가 소세지 그릴링하는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다. 악어 소세지로 만든 메뉴도 있지만 크림치즈를 잔뜩 올려주는 시애틀 핫도그를 선택했다. 가장자리가 완벽하게 크리스피하게 그릴링 된 소세지에 사워크라우트와 캐첩 머스터드를 잔뜩 끼얹었다. 차우더와는 또다른 차원으로 위를 달래주며 온몸에 전율이 퍼진다.

Nola Hot Dogs / 사진. ⓒ박은새

파이크 플레이스는 주말 관광객이 북적임에도 하나둘씩 일찍 문을 닫는다. 그래서 저녁으로 때울 게 마땅치 않은데 Beecher’s Handmade Cheese는 활발히 운영된다. 맥앤치즈도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시간이 없을때 고르던 메뉴. 김치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를 발견하고 테이크 아웃 주문을 했다. 치즈 농도가 매우 절묘했다. 미시시피 서쪽 아티산 치즈만 취급하는데, 20년 넘게 북적이는 이유가 있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 전경 / 사진. ⓒ박은새

'오리지널 스타벅스' 앞에 길게 줄선 모습을 보니 학창시절 스타벅스에서 별나게 주문을 한 기억이 난다. 밤샘 작업에 쪽잠을 잔 후 마감을 위해 다시 스튜디오로 향하던 길, 미국 동부의 매서운 추위에 완전 무장을 하고 커스트마이즈한 아이스라떼를 홀짝이며 정신을 차렸었다.

불현듯 찾아온 추억을 되새기며 파이크 플레이스의 석양을 마주한다. 비가 오면 오는대로, 흐리면 흐린대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생각과 감각을 흘려보낸다. 온통 회색이었던 도시에 푹 파묻혔던 시간, 속까지 느꼈던 으슬으슬한 추위에 몸을 움츠렸던 순간. 허기진 배를 채우자 온몸에 퍼지던 온기. 몸은 환경변화에 먼저 반응하고 둔감해진 감각들이 깨어난다.

고환율에, 세금, 팁까지 계산하면 8온스 짜리 커피 한 잔이 만 이천원에 육박한다. 사악한 커피값임에도 공항으로 향하기 전 Coffee Tab에 들렸다. 위기 청소년들을 바리스타로 육성하고 취업을 연결하는 곳이다. 원두는 Fulcrum에서 공급받고 팁도 안 받는다.

마지막 날이니 평소엔 외면하던 달콤한 시럽을 골랐다. 바리스타가 추천해 준 보라색 우베(Ube) 시럽 한 펌프. 입안에 퍼지는 낯설고 이국적인 단맛을 음미하며 공항으로 향하는 길, 문득 곧 벚꽃이 흐드러질 이 도시의 봄을 상상했다.

안개가 걷히고 벨뷰의 벚꽃이 필 즈음, 다시 이곳에 오고 싶다. 그때는 좀 더 가벼운 몸짓으로 스칸디나비안 연어 디쉬를 음미하며 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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