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에 담아낸 사진…이정진이 전하는 ‘명상’의 찰나

김현경 2026. 4. 1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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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진 개인전 ‘Unseen/Thing’
‘Unseen’ 시리즈 국내 최초 공개
사진을 ‘사유의 매체’로 확장
이정진 ‘Unseen #55’. [이정진. PKM 갤러리]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사진을 촬영할 때 카메라의 창을 통해 (대상과) 만나지는 경험 자체가 너무 중요한데, 인화지에 프린트하거나 디지털로 바로 출력하는 방식으로 표면에 얹히는 것은 만족이 안 됩니다. 깊이 배어 나와서 사진을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잘 포기가 안 돼요.”

사진을 인화지가 아닌 전통 한지에 담아내는 독창적 작업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아 온 이정진(65) 작가는 14일 서울 종로구 PKM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언신/씽(Unseen/Thing)’ 기자간담회에서 오랜 시간이 걸리는 한지 작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한국 작가로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지에 익숙했다. 여기에 인화지가 아닌 다른 소재 중 한지만이 물속에서도 내구성이 강하다는 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는 “감광 유제를 발랐을 때 분리가 안 되고 깊이 올라와서 내 작업이랑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공개되는 ‘Unseen’시리즈의 사진 촬영은 한 달 안에 이뤄졌지만 이를 한지로 옮기는 후반 작업에 10개월이 걸릴 정도로 한지 작업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방식을 지속해 온 것은 작업 과정이 사유와 명상을 담은 그의 작품 세계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한지라는 독특한 매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사진이면서 그림 같이 느껴진다. 일견 조선 시대 수묵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사진인지 그림인지 규정하는 게 중요한 것 같진 않다. 회화와 사진의 경계에 있기도 하고, 사진으로 시를 쓴다는 생각도 한다. 보는 사람이 중간에 있는 것 자체를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그 경계가 더 허물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정진 작가. [이정진. PKM 갤러리]

작가가 PKM 갤러리에서 6년 만에 갖는 이번 전시는 아이슬란드의 원시적 풍경에서 출발한 최신 시리즈 ‘Unseen’(2024)을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일상의 사물을 아날로그 기법으로 제작한 ‘Thing’(2003-2007) 시리즈도 함께 조명한다.

‘Unseen’ 시리즈는 아이슬란드의 경이로운 자연을 담은 작업이다. 작가에게 아이슬란드는 이전에 작업했던 적막한 미 대륙의 사막과는 달리, 시시각각 변화하는 날씨와 거친 파도를 가진 생동하는 장소다.

작가는 낯선 시공간에 몸과 정신을 맡긴 채, 풍경이 온전히 자신을 통과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검은 화산암과 흰 눈, 거품이 이는 파도, 거친 바위의 모습은 눈앞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기보다, 작가가 자연과 마주하며 투영한 내면의 ‘보이지 않는’ 풍경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시각화한 결과물이다. 그는 “촬영 과정에서 공포에 가까울 정도로 자연의 위력을 느꼈고, 그 과정에서 나를 흔드는 부분을 반영했다”고 부연했다.

‘Unseen’이 먼 곳의 자연을 담았다면, ‘Thing’은 작가 곁의 익숙하고 소박한 사물을 줌 인(zoom in)해 들여다본 작업이다. 작가의 유일한 스튜디오 사진 작업으로, 자신의 공간에 놓여 있던 일상의 기물들을 촬영하면서 시작됐다.

이정진은 사물과 긴 시간을 공유하며 관계를 맺고, 사물이 표면의 아름다움을 걷어내고 본질을 내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때가 됐다고 직감하는 순간 셔터를 눌렀다. 여백 위에 섬세하게 배치된 정물들은 본래의 용도나 관념으로부터 해방돼 고유한 영혼과 생명력을 얻은 존재로 재탄생한다. 작가는 “현존이라는 것은 형태나 껍질을 벗기는 작업”이라며 “오래된 물건의 기운이 스며드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 시리즈는 한지 인화를 포함해 전 과정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됐다. 이번 전시에선 라스트 에디션 등 희소성 높은 작업들이 전시된다.

‘Unseen’과 ‘Thing’은 대상도 시기도 다르지만 사물 안에 내재된 것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이정진의 작품이 ‘명상’의 순간을 체험하게 하는 지점이다.

외부 세계와 작가의 내면이 맞닿는 찰나, 그 찰나를 통해 관람객 또한 작품 너머의 세계로 연결되는 이정진의 전시는 오는 15일부터 5월 23일까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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