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바쳐 발레만 했기에…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인터뷰]

고승희 2026. 4. 14. 15:18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완벽의 ‘틀’ 깨고 자유라는 ‘본령’으로
ABT스튜디오 박수하·박건희·박윤재
오는 17~18일 마포아트센터 금의환향
ABT 스튜디오 컴퍼니 박수하 [마포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뉴욕 브로드웨이 890번지. ‘세계 발레의 심장’이라 불리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 연습실의 봄은 계절보다 느리게 도착한다. 뉴욕의 혹독한 칼바람이 빌딩 숲을 훑고 지나갈 때, K-발레의 원석들은 근육의 열기로 차가운 바닥을 데우며 자신들의 봄을 깨운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깨달았어요. ‘아, 내가 나의 자유를 바쳐서 발레만 하고 살고 있었구나’라고요. 후회하진 않아요. 어린 나이부터 갈고 닦았기에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요.” (박수하)

여덟 살에 토슈즈를 신은 박수하는 선화예중·고를 졸업한 ‘한국형 엘리트’의 전형이다. 오직 ‘발레’ 하나만을 보고 지난한 시간을 통과한 그는 로잔 국제 발레 콩쿠르 파이널리스트에 오른 이후 ABT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스쿨(JKO)에서 공부했다. 한국과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모두 거친 뒤, 그는 지난 시간을 담담히 복기한다. “한국에선 극한의 교육으로 기틀을 마련했고, 미국에선 춤추는 것을 즐기는 방법을 배웠다”고 그는 돌아본다.

세계 최정상 발레단 중 하나인 ABT의 등용문, ‘ABT 스튜디오 컴퍼니’에선 지금 한국인 무용수 세 사람이 저마다의 빛깔로 만개 중이다. ABT 정통 코스를 밟아온 박수하, 2025년 로잔 국제 발레 콩쿠르 우승자 박윤재(18), 2024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YAGP) 그랑프리의 박건희(21) 등이 그 주인공. 세 사람은 오는 17~18일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ABT 스튜디오 컴퍼니 발레 갈라’를 통해 찬란한 금의환향을 앞두고 있다.

단점 드러내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ABT 문법’

세 사람의 궤적은 다르지만, 종착지는 같았다. 세계가 이들을 시험했고, 압도적인 재능은 보석처럼 드러났다. 주요 콩쿠르를 거친 이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ABT 스튜디오 컴퍼니였다.

지난해 한국 남자 무용수 최초로 로잔 콩쿠르 1위와 ‘영재상’을 동시에 가져간 박윤재의 행보는 일찌감치 화제였다. 해외 유수 발레단의 러브콜이 쏟아졌지만, 선택은 단호했다. 박윤재는 “여러 제안을 받았지만, ABT 발레단 영상을 보는 순간 ‘나도 저 무대에서 저 무용수들처럼 춤추고 싶다’는 열망이 끓어올랐다”고 회상했다. 강렬한 확신과 예술적 직관이 그를 뉴욕으로 이끌었다.

ABT 스튜디오 컴퍼니 [마포문화재단 제공]

박건희와 박수하에게도 ABT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온 ‘꿈의 무대’였다. 열두 살에 발레를 시작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친 박건희는 “스튜디오 컴퍼니의 일원이 된 것만으로도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갈 기회를 얻은 영광”이라고 했다.

ABT 스튜디오 컴퍼니는 단순한 수련 기관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매년 단 12~14명만을 선발하는 소수정예 시스템으로, 입단 자체만으로 ‘프로 무용수’로서의 가능성을 증명한다. 현재 ABT 본단 무용수의 약 85%가 이곳 출신이며, 세계적인 발레리나 미스티 코플랜드 역시 이 과정을 통과했다.

세 사람이 꼽는 강점은 명확했다. 박수하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연습하며 매일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 특히 수많은 투어 활동이 가장 큰 자산”이라고 꼽았다.

“무대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예비 전문 무용수에게 무엇보다 소중해요. 한국에서 곧바로 컴퍼니에 입단했다면 이토록 방대한 무대 경험을 쌓으며 성장하지 못했을 거예요.” (박수하)

이곳에서 세 사람은 기술적 완성을 넘어 ‘아티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박윤재는 “무용수 고유의 개성과 매력을 이끌어내 주는 환경 덕분에 ‘자신에게 친절해지는 법(Be kind to yourself)’을 배웠다”고 고백했다.

“한국에선 메소드에 맞게 동작을 정제하고 단점을 보완하는 ‘틀’에 집중했다면, 이곳에선 단점을 숨기기보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법을 배워요.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물음표를 던지던 습관을 내려놓고, 나를 다독이며 평정심을 유지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 가장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박윤재)

박건희 역시 이 시스템의 정수를 “개별성을 발굴하는 지도”라고 정의했다. 한국처럼 기본기를 엄격히 다루되, 클래식부터 컨템포러리까지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며 무용수 개개인이 가진 고유의 색을 스스로 찾게 한다는 설명이다. 사샤 라데츠키 예술감독의 리더십 아래, 이들은 ‘정형화된 기준’이 아닌 ‘오직 나만이 낼 수 있는 맛’을 찾아가고 있었다.

ABT 스튜디오 컴퍼니 박건희 [마포문화재단 제공]

뉴욕에서의 생활은 치열한 경쟁보다는 서로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확장하는 ‘공존의 장’이다. 같은 건물에 살며 가족처럼 의지하는 다국적 동료들은 서로에게 가장 강력한 촉매제가 된다. 박건희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재능 넘치는 친구들과 함께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의지하는 과정이 정말 행복하다”며 “국적도, 배경도 다르기에 서로의 장점을 존중하며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때로는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배움이 된다. 박수하는 “모두가 동등하게 역할을 분배받기에 질투 없이 춤추는 행위 자체에 몰입할 수 있다”며 “나보다 성숙한 친구들을 보며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법을 배운다”고 전했다. 박윤재는 동료 케일라 맥(Kayla Mak)의 컨템포러리 작품을 보고 전율을 느꼈던 순간을 떠올리며 “춤으로 이끌어내는 힘과 무게감을 표현하는 방식을 보며 시야를 넓히고 있다”고 덧붙였다.

‘자유’ 위에 피어난 ‘K-발레’의 정점

한국 발레 특유의 강인한 정신력과 성실함은 세계 무대에서도 분명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성장한 세 사람은 한국형 교육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구조적 문제에 대해선 조심스럽고 예리한 진단을 내놓는다.

박수하는 “혹독한 훈련 체계 속에서 발레가 ‘예술’이라는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다”며 “개성이 억눌린 채 틀에 맞춰지기보다 기본기를 지키되 고유의 예술성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건희 또한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깔끔한 테크닉 위에 무용수만의 ‘맛’을 첨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ABT 스튜디오 컴퍼니 박윤재 [마포문화재단 제공]

박윤재는 교육 과정의 스펙트럼 확장을 언급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장르를 불문하고 다양한 춤을 접하며 시야를 넓혀야 한다”며 “컨템포러리와 클래식이 결합하는 현대 발레의 흐름에 맞춰 무용수들의 시선도 유연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만날 세 사람과 ABT 스튜디오 컴퍼니의 무대는 현재의 자신을 증명하는 자리다. 클래식과 컨템포러리가 교차하는 프로그램으로, 사샤 라데츠키 감독이 직접 엄선한 레퍼토리로 구성됐다. ‘라 바야데르’부터 ‘번스타인 인 어 버블(Bernstein in a Bubble)’까지. 서로 다른 시대와 언어로 한 무대에 오른다.

박건희는 ‘라 바야데르’의 솔로르와 ‘그랑 파 클래식’ 등 4개 작품에 출연, ‘다른 결’을 연결한다. “각기 다른 캐릭터와 ‘나’라는 존재가 잘 어우러지는 무대”라는 귀띔이다. 박수하는 자신의 강점인 클래식 스타일을 극대화한 ‘그랑 파 클래식’과 파트너와의 호흡이 중요한 ‘파리의 미국인 파드되’를 선보인다. 박윤재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돋보이는 작품을 만나 미국 발레 특유의 강렬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세 무용수는 각자의 시간표로 성장 중이다. 이들의 몸짓은 이제 ‘완벽한 기술’이라는 틀을 깨고, ‘자유로운 예술’이라는 본령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왔지만, 세 사람의 방향은 같은 곳을 향한다. 춤을 잘 추는 무용수를 넘어, ‘나만의 언어’를 가진 예술가가 되는 것. 브로드웨이의 혹독한 칼바람을 뚫고 서울의 봄 무대에 오르는 이들의 몸짓에 한국 발레의 내일이 푸른 싹을 틔우고 있다.

박윤재는 10년 전 객석에 앉아 있을 ‘꼬마 박윤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용기와 자신감을 꼭 쥐여주고 싶어요. 그 순수한 재능을 스스로 부정하지 말라고요.”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