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헤매길 좋아하는 사람의 ‘길’

고주영 2026. 4. 1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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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 독립기획자 고주영이 만나다] 심리상담사·코치 김연임

거의 3년의 시간을 지나 마주 앉은 연임과의 대화는 당연히, 건강 이야기로 시작됐다. 유독 검던 우리의 머리칼이 절반은 하얘진 이슈, 여성호르몬 이슈, 연임의 몸에 기어이 나타난 유전성의 의료적 징후 이슈, 지난 한 해 나를 쥐고 흔든 각종 증상과 병원 순례 배틀… 나이는 그냥 지나가는 젊음을 아쉬워하는 척하며 먹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드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은 우리가 처음 만난 20년 전에는 꿈에도 몰랐다.

▲ “사람들이 그런다? 네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널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럼 난 그냥 ‘저는 김연임인데요’ 해.” (사진 촬영: 고주영)

엄마 마주하기-“죽을 둥 살 둥 매달리게 되는 문제잖아”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였더라, 따져보니 나의 아빠가 갑작스럽게 암 투병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병문안도 간병 교대도 할 수 없던 시기, 40년 넘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이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깝지 못했던 사람에게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무력하고 혼란스러웠던 때, 연임에게 그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나의 아빠는 세상을 떠났고, 그 이듬해 연임의 아빠도 세상을 떠났다.

“아빤 학교에서 영어교사이자 상담교사였어. 시도 쓰고 먹그림도 그리고, 감수성이 풍부한 분이셨지. 덕분에 나도 어릴 때부터 전시나 공연, 영화관 같은 델 자주 갔지. 내 기억에 엄마는 아빠와의 관계가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어린 나는 엄마 편이 되어주고 싶어서 아빠를 되게 미워하고 못되게 굴었어. 엄마는 무섭고 슬퍼보였고, 아빠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 믿었거든. 시간이 흘러 아빠 돌아가신 후에 과거의 나를 돌이켜보면서 이런 내 모습을 알게 되었어. 죄책감과 원망하는 마음이 뒤엉켜 엄마와의 관계가 더욱 어려웠고 거리를 뒀어.

일 년 넘게 상담 받고 괴로워하다 알게 됐어. 엄마는 누군가의 정서나 감정을 받아주기 힘들었던 거야. 엄마도 당신의 감정을 읽어줬던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려운 환경에서 너무 힘든 일들을 혼자 경험해야 했으니까. 탱크처럼 씩씩하게 헤쳐나가는 방법밖에 몰랐어.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 험한 전쟁터에도, 사랑만 바라는 꽃밭 같은 딸이 손을 내밀어도, 상대가 얼마나 아플지 느끼지 못하고 탱크처럼 밀어붙였던 거야.

엄마와의 어려움이 나한텐 큰 공부가 됐어. 엄마와의 관계는 죽을 둥 살 둥 매달리게 되는 문제잖아. 나를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문제였지만, 그걸 들여다보고 해결하려다 보니까 (심리를 공부하고 상담하는) 나에겐 결국 큰 도움이 된 것 같아. 엄마의 하소연, 아빠의 하소연을 가운데에서 듣던 어린 시절의 경험도 경청의 조기교육이었던 것 같고.”

 

질문 마주하기-“춤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연임과 나는 30대 초반에 신생 예술지원기관에서 아주 짧은 기간 동료로 지냈다. 연임이 기관을 그만두고 다른 길로 나아가는 동안, 나는 여전히 그 직장에 머물며 연임의 탁월한 영어 실력이 필요할 때 일을 부탁하기도 했고, 그러다 나 역시 바깥으로 나와서 공연예술 영역에 속하게 되었을 때 어느 지점에서 잠깐 마주쳤다가 또 각자의 길을 떠다니곤 했다.

▲ 연임과 나는 30대 초반에 신생 예술지원기관에서 아주 짧은 기간 동료로 지냈다. 이후로도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마주쳤다가 또 각자의 길을 떠나곤 했다. (사진 촬영: 고주영)

“나, 대학에서는 영어교육 전공해서 정교사 자격증도 땄었지. 그런데 그땐 교사가 되긴 싫었어. 부모님 두 분 다 교사라 너무 익숙해서 흥미가 없었던 것 같아. 대신 예술에 관심이 있었지. 하지만 어떻게 그 분야에서 일을 해야 하는지는 몰랐던 거야. 대학 때 어느 날 갑자기 춤을 춰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 학교 무용과에 전화를 한 거야. ‘춤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그랬더니 전화 받은 조교 분이 자기 과 동기가 하고 있는 개인 강습을 소개해줬어. 거기로 무용을 배우러 다녔는데, 그 무용 선생님이 나중에 대학원 ‘예술경영과’에 들어갔다더라고. ‘아!’ 그래서 나도 예술경영과를 들어갔어. 그 공부를 하고 (우리가 함께 일했던) 예술지원기관에 들어간 거였어.

마케팅을 좀 더 본격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경영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기도 하고, 외국인 남편과 살면서 한국어 교육을 공부하기도 하고. 아카데믹한 공부보다는 나의 삶에 필요한 공부를 찾아서 하고, 일과 삶에 적용해 보고 했던 것 같아. 공공극장, 민간축제, 무용단체, 음악단체, 개인 아티스트, 드라마제작사, 비엔날레 사무국, 그리고 대기업 전략팀까지... 뭔가가 궁금하면 일단은 책을 읽거나 물어보고, 공부하고, 그 다음에는 필드에서 일해보고, 또 다시 공부하고 일하고, 그런 식이었던 것 같아….

‘이래도 되나 싶고 한 가지를 꾸준히 하지 않는 게 괜찮은가.’ 스스로 불편할 때가 있었어.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 됐고. 그런데, 결국 내가 계속 불안함을 느끼고 걸려 넘어진 건 편가르기 같은 ‘집단문화’, 층층시하의 ‘조직문화’였던 것 같아. 나의 그런 패턴을 발견하면서 심리 공부를 시작했어. 2009년에 대기업을 퇴사하면서 가능하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 내 호흡에 맞게 사는 방식을 찾아보자고 결심했던 것 같아.”

마침내 ‘무소속’이 된 연임은 공연예술 매거진 편집일을 꽤 오랫동안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무용전문극장을 표방했던 LIG아트홀이 발간하던 계간지 [inter-VIEW], 그리고 서울문화재단 산하 서울무용센터가 발행했던 웹진 [춤:in]. 매우 개인적인 평가라는 전제하에 말하자면, 두 잡지 모두 무용이라는 키워드에서 출발하지만, 전통적인 장르의 경계가 얼마나 혁신적으로, 흥미롭고 아름답게 확장되고 기어이 무색해질 수 있는지를 보기 좋게 실험했던 매체였다. 내 딴에는 열심히 연극을 기획하고 있는데, 별로 연극으로 보여지(보아주)지 않아 외롭던 시절에 나는 이 매체의 지향에 열렬히 공감했고 지지했고 힘과 영향을 받았다. 지금은 모두 사라진 두 매거진이 가장 빛나던 시절을 연임이 만들었다.

“나는 책상 앞에서 공부만 했던 사람이잖아. 그런데, 무용하는 사람들을 만난 게 나에겐 너무 새로운 경험이었던 거야. 그때까지 막연하게만 인식하고 있었던 몸을 섬세한 연장으로 쓰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본 거지. 있는 곳이잖아. 그 무용단엔 다양한 몸들이 있었어. 땀내 나고, 멍들고, 까매진 발에, 땅딸막한, 길고 가냘픈 몸들이 함께 움직이는 걸 보면서 ‘아! 아름답다!’ 생각했어. 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터부, 선입견 이런 것들이 완전히 깨진 거야.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 세계관 자체가 달라진 거지.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어. 그 경험이 나를 예술계에서 버틸 수 있게 해준 것 같아. 그래서 고마움이 있었고, 이 분야에 진 빚을 갚고 싶다,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사심 없이’ 잡지를 만드는 원동력이 됐지.

나는 얇고 넓게 엄청 다양한 경험들을 해왔으니 그것들이 어떻게 세상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감이 좀 있었던 것 같아. 무용도 내가 직접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거리를 두고 보니, 곁의 무엇과 연결되는지가 보였던 것 같고.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내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는 작업이기도 했고. 내가 이런 걸 잘, 혹은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이런 일이 나에게 잘 맞는구나, 하는 걸 발견해서 기쁜 경험이었고, 굉장히 많이 배우기도 했어. 마무리가 좀 갑작스럽고, 문화적이지도 예술적이지도 않은 방식이었던 게 아쉽긴 했지만.”

▲ “이제는 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고 그 삶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연임은 현재 심리상담사 겸 상담코치로 일하고 있다. (사진 촬영: 고주영)

마음 마주하기-“누군가 성장하는 걸 보는 게 너무 좋은 거야”

“마음이 힘들어서 혼자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했잖아. 그때 찾아간 대학 심리학과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 상담을 받고 싶은 건지, 상담을 하고 싶은 건지를 먼저 생각해보라고. 생각해보니 내가 도움을 받고 싶은 거더라고. 그래서 상담을 받기 시작했어.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흘러 코칭을 공부하며 숙제를 하다가 깨달은 거야. ‘아, 나는 누군가 성장하고, 치유되고, 편안해지도록 돕는 게 기쁘구나. 이젠 그 일을 해야겠다.’ 나를 좀 알게 됐고, 내 삶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지 고민하고,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 기쁨을 느끼는 일을 알아챈 거지. 그래서 상담코칭 전공으로 대학원에 갔어. 이제는 내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고 그 삶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만난 이들이 성장하고, 편안해지고, 건강해지는 게 너무 좋아. 내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하고.

지금은 대학 상담소에서 학생들 상담도 하고, 개인 상담도 해. SNS(@a___dear___friend, 언더바 3개씩)로 가끔 홍보를 할 때도 있는데, 상담 받으셨던 분들이 소개해주셔서 오는 경우가 제일 많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조금씩 하고 있어. 지금은 딱 이 정도가 좋은 것 같은데, 물론 현실적인 고민은 되지. 어쨌든 지금은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자, 그냥 하루하루를 잘 지내보자, 그냥 그런 정도.”

 

나 마주하기-“지금의 내가 모이면 어느 날엔가 내가 되어 있겠지”

“사람들이 그런다? 네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럼 난 그냥 ‘저는 김연임인데요’ 해. 그리고 제가 요새 관심 있는 건요, 아니면 요새 하는 일은요, 그렇게 덧붙이지. 내 직업이 뭔지, 직함이 뭔지, 어디 소속인지를 계속 증명해 도구로 삼아 봤자 뭐 어쩌겠어. 나는 맨날 변하는 사람인데, 구르는 돌 같은 애인데 뭐 어쩔 거야.

나의 ‘명확한 선택과 결심’의 바탕엔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있는 힘껏 다 하는 삶을 살 거야’, 그거 하나. 나에게 명확함이 있다면 그때그때 순간의 명확함이지,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한 명확함, 비전 같은 건 없어. 대신 그런 믿음은 있는 것 같아. 나는 내가 길을 헤매는 걸 되게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 진짜 길도, 내 삶에서의 길도 있는데, 실제로 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난 헤매는 걸 좋아해. 낯선 길로 계속 가보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더라고. 빨리 가는 길, 쉬운 길이 있겠지만, 모르는 길을 계속 탐험하거나 탐색하는 게 좋아, 그러다 길을 만들기도 하고. 막혀 있으면 그냥 돌아오기도 하고. 하지만 돌아온 그 자리가 같은 자리가 아니라고 믿어.

지금의 내가 모이면 어느 날엔가 내가 되어 있겠지. 아님 말고.(웃음)”

 

[필자 소개] 고주영. 몇몇 예술축제와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안산순례길 프로젝트](2015~2019), [플랜Q 프로젝트](2018~2023),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현재)를 기획·제작했고, 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2007년부터 〈일다〉에 일본 제휴 매체인 〈페민〉 기사를 번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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