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설계한 한글…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의 가치 [강형원의 Insight]


㈜미래엔 교과서박물관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위탁 관리하고 있는 귀중한 한글 금속활자본 국보 월인천강지곡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특별 협조를 받아 열람했다.
국보 월인천강지곡은 우리 정체성 1호인 한국말을 매우 구체적이고 성의있게 표기한 책이다.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라는 우리말 속담이 있듯이,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우리말의 언어적 우수함은 아주 세밀한 소리를 또박또박 음절로 표현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에 있다.
조선 제4대 왕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모아 훈민정음으로 1447년에 편찬한 국보 월인천강지곡 상(上)권 책은, 최초로 우리말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면서 우리글 위주로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고, 15세기 당시 동아시아 공통 문자였던 한자를 작은 글꼴로 부수 설명 정도로 표기했다.
세종대왕은 왕비 소헌왕후(1395~1446)를 잃은 후,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에 깊이 의지하여 왕비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백성을 교육하고, 우리 언어로 왕비를 추모하는 진리를 대중에게 전달하려는 책이 바로 월인천강지곡이다.
『월인천강지곡』의 진정한 가치는 그 언어 구조에 있다. 이 책에는 오늘날 사라진 순경음 ㅱ, ㅸ과 같은 정교한 음가 체계가 살아 있다. 자음과 모음의 결합 방식은 단순한 표기를 넘어, 인간의 발음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였다. 다시 말해 훈민정음은 문자라기보다 ‘소리를 설계한 시스템’이었다. B와 V, P와 F, L과 R을 구분할 수 있었던 구조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음성학적 성취였다. 훈민정음 순경음 표기법에서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스치며 내는 소리로, 영어의 다양한 V나 F, 또는 M 발음을 설명할 수 있다.


20세기, 우리는 한글을 단순화했다
훈민정음에서 가능했던 B와 V, F와 P, 그리고 L과 R을 구분하는 표기법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정착된 한글에서 삭제되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정책으로 제정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에서 ‘경성어’를 한국어의 표준어로 결정하면서, 각 지방에서 쓰던 고유의 많은 단어가 소멸되어 왔고, 28자에서 24자로 줄어들면서 영어 발음에서 흔히 있는 아래아 발음, 즉 AW 발음을 표기하는 능력이 한글에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동안 한글 24자는 한국인의 문맹을 퇴치해온 엄청난 성과를 이루었지만,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영어의 정확한 표기 능력의 부재로 인한 국가적인 어설픈 영어 교육 상황은 한국 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도전이자 숙제이다.
세계적인 표기 문자로서의 우월한 잠재력은 훈민정음에 있고, 월인천강지곡 훈민정음 책은 바로 그 우수한 글을 실천한 독보적인 유물이다.


21세기의 경쟁력은 결국 소통이다
21세기 국제적인 경쟁력은 소통 능력에서 나온다. 영어 문화권에서 영어 능력은 대화에서 누락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며, 언어와 문화의 무지로 차별받는 불평등을 극복하는 필수 능력이다.
어디를 가나 통용될 수 있는 능력이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전문가의 척도이며, 그 배후에는 미국식 영어 능력이 있다.
영국식으로 좌측 통행을 하는 싱가포르에서 공식 언어는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이지만, 미국식 영어를 학교, 국가 행정, 그리고 상업 언어로 주로 사용하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은 15세기 한국의 금속활자 기술을 또렷하게 보여주는데, 글꼴이 바로 한 해 전인 1446년 10월에 소개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글씨체와는 차별화되는, 더욱 진화된 한글 글꼴을 보여주는 유물이었다.
월인천강지곡 글씨체는 “훈민정음 해례본 글씨체보다 조형성이 뛰어나고, 글꼴이 더욱 실용성 있게 발전했다”고 수십 년간 월인천강지곡을 연구해온 박병천 국립경인교육대학교 명예교수는 말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글씨체에서의 쓰는 점을 활판용 활자로 제작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는데, 월인천강지곡 글씨체에서는 아래아 이외의 모음을 만들 때 직사각형으로 처리하면서 쓰기 쉽게 개선되었다”고 박 교수는 설명한다.
글자의 왼쪽에 찍어 성조(평성, 상성, 거성, 입성)를 구분하던 방점(·)은 작은 동그라미 형태로 활판에 적용되면서, 조판의 실용성을 높인 글꼴로 진화되었다.
월인천강지곡에서 사용된 언어는 훈민정음이 20세기 외국어 발음에 맞춰 단순화되기 이전, 현대 한글보다 더 우월한 표기 능력과 또렷한 음절을 한마디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능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답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 있다. 『월인천강지곡』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옛 문헌이 아니라, 한글이 본래 가지고 있던 확장 가능성이다. 훈민정음은 이미 15세기에 세계 어느 언어보다 정밀하게 소리를 기록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그것을 다시 복원할 의지가 있는가이다.
세종은 글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소통의 질서를 다시 설계했다. 이제 질문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우리는 그 유산을 단순한 문화재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21세기 언어 전략으로 재해석할 것인가.
우리만의 독특한 한국말을 세상에서 가장 명확하고 뚜렷하게 표현할 수 있는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을 조상으로 모시는 우리는 복받은 후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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