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수용소에서도 무시치의 드로잉은 멈추지 않았다

아르떼 2026. 4. 1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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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선경의 미술관이 던지는 질문들
슬로베니아 국립미술관
슬로베니아가 사랑한 화가, 조란 무시치의 증언
'우리가 마지막이 아니다'

슬로베니아는 내게도 낯선 나라였다. 사람들은 흔히 이 나라를 동유럽국가로 꼽는다. 그러나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앙유럽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남들이 보는 눈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체성이 제법 다른 그곳의 미술은 어떤 얼굴일까? 나는 이런 궁금증을 안고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Ljubljana)의 국립미술관을 찾았다.

한때 사회주의 국가였던 슬로베니아의 국립미술관(Narodna galerija)은 어떤 컬렉션을 품고 있을까? 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사회주의 이념을 선전하는 국가 주도의 예술 형식 말이다.

추측과 다르게 미술관은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회화를 폭넓게 아우르고 있다. 기독교 성서 속 이야기를 다룬 제단화나 성자를 그린 작품들은 다른 유럽 미술관에서도 볼 수 있는 전형적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근대 회화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구소련식 사회주의 미술과는 거리가 먼 작품이 주를 이뤘다.

전시한 컬렉션만 놓고 보면 이 미술관은 서유럽의 미술관과 더 닮았다. 슬로베니아의 전신인 유고슬라비아가 비록 사회주의 국가이기는 했지만 소련과는 다소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을 떠올리자 조금 이해가 되었다. 또 이 나라가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서유럽과 일체감을 높이려고 전시작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내 예상을 뛰어넘는 다채로운 컬렉션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가는 조란 무시치(Zoran Mušič, 1909~2005)였다. 미술관은 별도의 전시 공간까지 마련해 무시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밝고 목가적인 분위기부터 색감이 암울한 그림까지 무시치의 화풍은 다양했다. 한 작가가 그린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정도로 시기마다 화풍이 크게 달랐다. 전시장 벽을 빼곡히 채운 작품 중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해골 같은 모습을 한 인물이 절망한 표정으로 위를 쳐다보는 장면이었다.

움푹 꺼진 눈과 벌어진 입 그리고 힘없이 모은 손에서 나는 공포를 느꼈다. 작품 속 인물은 충격적 장면을 목격한 것 같았다. 무시치가 1974년에 제작한 <우리가 마지막이 아니다(We Are Not the Last)>라는 작품이었다.

같은 제목으로 제작한 다른 작업들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암울하게 담아냈다. 그로테스크한 이런 장면은 작가의 경험에서 나왔다.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지난 1944년에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던 무시치를 체포했다. 그는 다하우 수용소에 끌려갔다. 나치가 가장 먼저 만들고 가장 늦게까지 운영한 수용소였다.

나치가 그를 체포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역사적 맥락으로 추측할 뿐이다. 이 시기에 슬로베니아는 국가는 아니었다. 민족으로서 정체성만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이 지역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나누어 점령한 상태였다. 이 두 국가는 교육과 행정 전반을 통제했다. 특히 슬로베니아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이름과 생활 방식까지 바꾸도록 강요했다.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는 어쩌면 이렇게 비슷했을까? 이런 억압 속에서 자기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활동을 드러내 놓고 하지 않았더라도 존재만으로 ‘위험한 인물’로 분류하는 일도 허다했다. 무시치도 그렇지 않았을까?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젊은 슬로베니아 화가라는 점만으로 반항의 씨앗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을 것이다.

나치 수용소에 갇혀서도 무시치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수용소에서 몰래 약 200여개가 넘는 드로잉을 남겼다. 무시치가 이때 남긴 드로잉을 큰 규모의 작품으로 옮겨 담은 것은 수십 년이 지난 1970년대였다. 수용소에서의 악몽을 바로 작업으로 옮기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무시치는 전쟁이 끝난 뒤에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이미지들을 그렸다.

무시치는 지금의 크로아티아에 속한 달마티아(Dalmatia) 지역의 슬로베니아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쟁 직후에 한 작업에 고향 달마티아의 풍경과 점박이 말을 반복해서 담았다. 황토색과 회색을 섞은 절제된 색감과 단순한 형태의 이 시기 그의 그림은 평온하고 명상적이다.

전쟁 후 무시치는 베니스와 파리를 오가며 활동했고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명성은 어떤 의미였을까? 지옥 같은 수용소를 벗어나 다시 찾은 자유와 명성은 그에게 작은 행복과 안도감을 줬을 것이다. 그래도 뼛속 깊이 남은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하지는 못했다.

무시치는 “나는 다하우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매일같이 죽음이라는 공포에 떨어야 하는 끔찍한 경험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어떤 기억은 내면에 깊게 가라앉아 있다가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가시를 드러낸다.

무시치는 노년기에 테레빈유 알레르기로 고생했다. 테레빈유는 유화를 그릴 때 쓰는 용제다. 유화를 쓰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새로운 재료로 아크릴을 사용했다. 아크릴은 용제가 없이도 유화보다 빠르게 마른다. 그리고 20세기 중반부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수용소에서도 드로잉을 멈추지 않았던 작가에게 재료의 변화가 별 대수였을까?

무시치는 세상 마지막 날까지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죽음의 공포가 그를 짓눌러도 몸이 재료를 거부해도 그는 다시 그렸다. 그 굳은 의지가 슬로베니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무시치는 그렇게 오래도록 슬로베니아에서 사랑받는 화가로 남았다.

우리가 마지막이 아니다. 슬로베니아 국립미술관에 방문했을 때는 이 말이 과거의 비극을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현재진행형인 것 같아 전율하게 된다.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고 믿지만 현실은 그 믿음을 자주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일까? 무시치의 그림 속 인물들은 현재를 사는 우리와 겹쳐 보인다.

김선경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