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은 규제 선언만, 준수하는 건 업체가 알아서” 업비트 판결문 속 황당 규제
재판에서 드러난 가상 자산 규제 공백
당국 “알겠다” 해놓고 “업계 일방 결정” 발 빼기도

금융 당국이 규제와 그에 따른 지침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고서는, 업체가 규제를 알아서 준수하지 않았다며 제재를 가했다가 법원에서 제동이 걸렸다. 금융 당국이 면밀한 규제 설계 없이 ‘때려잡기’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14일 본지가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9일 금융정보분석원(FIU)이 국내 가상 자산 거래소 업비트에 부과한 6개월 영업 일부 정지 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규제 당국의 자의적 법 집행 가능성”
FIU는 작년 2월 업비트가 해외 미신고 가상 자산 사업자 19곳과 총 4만4948건의 거래를 중개했다며 영업 일부 정지 제재를 내렸다. 특정금융정보정보법상 업비트와 같은 가상 자산 사업자는 금융 당국이 지정한 해외 미신고 사업자와 거래를 해선 안 된다. 자금 세탁에 활용되거나, 범죄 자금으로 쓰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재판에서 FIU는 해외 미신고 가상 자산 사업자와의 거래가 금지된 만큼, 업비트와 같은 거래소가 알아서 그 의무를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융 당국이 개별적으로 지침을 제시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FIU가 여러 차례 해외 미신고 사업자와 거래하지 말라는 경고를 내놨음에도, 업비트가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재판부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규제 당국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단순히 ‘금지 의무’만을 선언하고 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나 행위 기준 등에 대한 지침도 제시하지 않았다”며 “규제를 지켜야 하는 당사자로선 최소한 어떠한 정도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 규제 당국의 자의적 법 집행 가능성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꼬집었다.
◇규제 발 빼기 논란도
업비트는 해외 미신고 사업자와의 거래를 막기 위해 고객을 대상으로 불법 거래소로 돈을 보내는 게 아니라는 확약서를 받았다. 분석 업체 체이널리시스코리아의 가상 자산 모니터링 시스템을 통해 자금이 넘어가는 거래소의 정보도 수집했다. 하지만 해외 미신고 가상 자산 사업자와의 거래를 차단하지는 못했다. 재판부는 이 역시 규제 공백이 낳은 결과라고 짚었다. 재판부는 “거래소가 지켰어야 하는 조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업비트가 필요한 조치를 시행한 것”이라고 했다.
확약서를 받은 것을 두고 금융 당국이 발을 빼는 입장을 취한 것도 도마에 올랐다. 현재 ‘트래블룰’과 ‘화이트리스트’ 제도에 따라, 국내 가상 자산 거래소에서 국내외 다른 거래소로 100만원 이상 송금하려면 고객과 거래소 정보를 반드시 확인한다. 따라서 미신고 사업자와 거래할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100만원 미만의 자금은 별도 확인 절차가 없다.
이에 국내 5대 가상 자산 거래소 협의체인 닥사(DAXA)가 마련한 조치가 확약서다. 고객이 불법 거래소로 자금을 보내는 게 아님을 약속하도록 해, 자정 효과를 거두겠다는 취지다. DAXA 준법감시인은 이 같은 확약서 공지 내용을 FIU 담당 사무관에게 공유했다. 이 사무관은 “알겠습니다. 공지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금융 당국은 “DAXA가 일방적으로 통보한 결정일 뿐”이라고 했다. 재판부는 이를 두고 “담당 사무관이 확약서 초안을 검토하는 등 지도·감독했다”고 지적했다.
◇비슷한 제재 되풀이해
업계에서는 당국이 가상 자산 시장이라는 신산업에 대한 규제를 촘촘하게 설계할 시간과 역량이 부족했다 보니, 사업자들을 때려잡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FIU는 지난달 빗썸에 대해 영업 일부 정지 6개월과 과태료 368억원을 부과한 데 이어, 13일에는 코인원을 대상으로 영업 일부 정지 3개월과 과태료 52억원을 징계를 내렸다. 사유는 업비트와 마찬가지로 해외 미신고 사업자 거래 금지 의무를 지키지 않고, 고객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가상 자산 기본법 도입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등 법적 공백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번 재판에서 경고한 대로 당국의 자의적인 법 집행이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여성법학’ 강의 시작, 배경숙 인하대 명예교수 별세
- [속보] 민주당 재심위, 안호영 전북지사 후보 재심 신청 기각
- ‘현직 항공사 기장 살해’ 김동환 구속 기소
- 尹, 법정서 재회한 김건희에 미소…퇴정할 땐 눈인사
- [속보] 검찰, ‘李 대통령 허위사실 유포’ 전한길 구속 영장 청구
- 尹 부부 9개월 만에 법정 대면...윤석열, 김건희 향해 미소
- ‘국회 출입 통제’ 前 경찰 지휘부 3명, 내란 혐의로 검찰 송치
- 쌍방울 前부회장 “李 방북 대가로 필리핀에서 리호남 만나 돈 줬다”
- ‘방첩사 블랙리스트’ 최강욱 전 의원 2차 특검 참고인 조사
- 60대 모친 살해 후 자해… 경찰, 40대 男 구속영장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