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보석 같은 순간들… 기어이 번져나가는 일상의 찬란함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회화·걸개그림 등 ‘인물의 단순화’로 투영
“사람의 눈·코·입을 그리듯이 풍경 그렸다”
상흔 깃든 제주 폭포 아래서의 평온한 일상
러시아워 퇴근 길 위 붉게 물든 삶의 사연…
‘오늘’이라는 삶과 그 속에 깃든 가치를 찾다
미술과 현실은 늘 나란히 존재해 왔다. 작가의 눈에 비친 찰나를 직설적으로 기록하든, 시대적 공기를 특정한 형태로 은유하든, 미술은 언제나 현실에 뿌리를 둔다. ‘리얼리즘’이란 사조는 19세기 중엽 선언적으로 정립되었지만, 오늘날에는 단일한 양식을 넘어 각기 다른 진실을 담아내는 다각적 태도로 존재한다. 특히 거대 담론이 사라진 동시대 미술에서 ‘리얼’함이란 화자가 선택한 현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떠한 형태로 감각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진다. 지각이 곧 세계를 구성한다는 현상학적 관점이나, 세계가 객관적 실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식에 따라 제작된다는 넬슨 굿맨의 논의처럼, 오늘날 리얼리티는 주관적 감각의 층위에 따라 다성적으로 존재한다.

◆리얼하지 않아 리얼한
이전에는 주변 인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초상을 통해 세밀하고 특수한 서사에 집중했다면, 이번 전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인물의 단순화’다. 나이와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노랗고 말랑한 만화적 캐릭터는 2023년 자화상 연작에서 처음 등장했다. 타인을 그리는 데 몰입하던 작가가 정작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며 그려낸 결과물이었다. 작가는 이 인물의 작업에 지쳐 테이블 위로 녹아내리거나 우울한 얼굴로 노래방 마이크를 쥐고 있는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고 재치 있게 투영했다.
유연하고 단순한 형태의 인물은 이제 작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로 확장된다. 비슷한 모습의 이들은 익명의 공포 대신, 우리가 본질적으로 공통된 존재들이라는 안도감을 준다. 특정한 개인의 정보가 부재하기에 누구나 자신을 무리 없이 투영해 볼 수 있다.
매끈하고 유연한 실루엣의 인물들은 군중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행진을 위해 숲에 모여들거나, 밤이 올 때까지 악기를 연주하고, 해가 질 때까지 같은 자리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리얼’하지 않은 외형 덕분에, 오히려 풍경 속에 담긴 감정의 농도는 현실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군집을 이루는 구름처럼 애틋한 감정으로 묶인 존재들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휘발되지 않고 남겨질 오늘의 다정한 목격담이 된다.

인물과 풍경은 이내 서로에게 스며든다. “사람의 눈, 코, 입을 그리듯이 풍경을 그렸다”는 작가의 고백처럼, 그의 화면에서 풍경은 독립된 객체가 아닌, 그곳을 거쳐 간 이들의 사연이 축적된 무대로 그려진다. ‘새벽녘 폭포 아래서’는 풍경의 다층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정방폭포 아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군집 뒤로, 제주 4·3사건이라는 역사적 비극의 장소성이 중첩된다. 거시적 역사의 상흔과 미시적 일상의 평온함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작가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나아가 화면에서 인물을 지워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자리에 머물렀던 존재를 소환하기도 한다. ‘해변의 사람들’이나 ‘한여름 강릉과 너의 얼굴’에는 제목과 달리 인물이 부재한다. 풍경 앞에서 누구나 한 번쯤 그리운 이를 떠올려 보았듯, 작가는 사적 기억이 각인된 특정한 장소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그 속에 침전된 잔상과 그리움을 나직이 불러낸다. 이우성에게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안부를 묻는 일이자, 그 존재의 초상을 풍경에 빌려 기록하는 일일 것이다.

이우성의 도시 풍경 속에서 배경은 결코 뒤로 밀려나 있지 않다. 무심히 지나치는 거리의 간판들, 성냥갑처럼 빼곡히 늘어선 아파트의 작은 창문들, 길가에 세워진 차에도 삶이 깃들어 있다. 천편일률적인 건물과 차가운 도시의 모습도 작가의 눈을 거치면 노란 인물들의 체온을 닮은 삶의 무대가 된다. 어느 가을날 은행나무 아래 주차장을 그린 ‘황금빛 가을과 꿈꾸는 선생님’에서도 그러하다. 누군가에게는 불청객일 뿐인 금빛 부스러기들은 작가의 화면 속에서 별처럼 흩날리고 ‘꿈꾸는 선생님’의 낭만이 된다.
◆찬란한 삶의 증거들
인물에서 풍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했지만, 이우성이 회화의 틀 안에서 붙잡아두려는 본질은 변함없다. 바로 ‘오늘’이라는 이름의 삶과 그 속에 깃든 가치다. 그가 그리는 ‘오늘’은 단순한 현재의 박제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사연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감각을 밀어 올리는 다층적인 시간이다.

이우성의 리얼리즘은 전시 제목처럼 수많은 ‘오늘의 질문’의 형태로 계속해서 나아갈 테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삶의 보석 같은 순간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세상의 풍경으로 확장시키는 온유한 집념이 자리한다. 거창한 선언이 아니더라도 매일을 기어이 살아내게 하는 힘. 이우성의 화면은 그 증거들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 춤과 노래, 속삭임이 일렁이는 그의 풍경 앞에 서서 묻는다. 우리는 이제, 어떠한 현실을 살아갈 것인가.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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