앓던 이 빠졌다…오르반 퇴장에 EU '반색'(종합2보)

현윤경 2026. 4. 14.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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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수장, 헝가리 정권 교체 '70년전 반소련 봉기'에 빗대
우크라 대출지원 등 멈춰섰던 현안에 돌파구 기대
샤를 미셸 전 EU 의장 "EU·헝가리 모두에 중요한 순간"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브뤼셀=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유럽연합(EU)의 정책에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으며 유럽의 단결을 해치던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가 16년 만에 실권하자 EU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12일(현지시간) 오르반 총리가 총선 패배를 인정한 지 단 17분 만에 소셜미디어에 "헝가리는 유럽을 선택했다. 한 나라가 유럽으로의 길을 되찾았다. EU는 더 강해질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2019년부터 EU를 이끄는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게 오르반 총리의 실각은 '앓던 이'가 빠진 격이나 마찬가지라 헝가리 총선 결과가 사실상 확정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환영 메시지를 올렸다고 폴리티코 등 외신은 짚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야심차게 밀어붙인 정책에 번번이 딴지를 놓으며 좌절감을 안긴 오르반 총리는 이번 총선 과정에서도 'EU 때리기'를 최우선 선거 전략으로 삼았다. 그가 이끄는 정당 피데스는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을 등장시킨 비판 광고까지 제작해 EU 공격에 열을 올릴 정도였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13일에도 이번 선거 결과를 '근본적 자유의 승리'라고 규정하며 오르반 총리의 실각은 1956년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소련 봉기, 1989년 헝가리의 공산주의 탈피에 필적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고 로이터는 전했다.

폰데어라이엔은 이날 브뤼셀에서 기자들에게 "헝가리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여러분은 다시 해냈다!"며 "1956년 분연히 일어섰을 때처럼, 1989년 유럽을 갈라놓던 철조망을 가장 먼저 끊어냈을 때처럼, 이번에도 다시 한번 역경을 이겨냈다"고 강조했다.

헝가리 총선에 혹여라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경계하며 오르반 총리를 향한 비판을 최대한 자제한 채 초조하게 결과를 지켜보던 다른 유럽 지도자들도 오르반 총리의 실각이 확정되자 안도하며 축하 메시지를 쏟아냈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오늘은 유럽이 승리했고, 유럽의 가치가 승리했다"고 말했고,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소셜미디어에 "헝가리, 폴란드, 유럽이 다시 함께한다! 러시아인들은 집에 가라"고 적었다. 동시에 유럽에는 친화적이고, 러시아에는 비판적인 머저르 페테르 티서당 대표의 승리를 반겼다.

EU는 오르반 총리의 퇴장으로 그동안 헝가리의 반대로 진척이 되지 못하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900억 유로(152조원) 대출 지원, 러시아 추가 제재,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등의 핵심 현안에 돌파구가 열릴 것으로 기대한다.

티서당이 전체의 3분의 2가 넘는 138석을 확보해 정치·사회 시스템 개혁을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된 만큼 그동안 EU가 헝가리에 요구해온 사법 개혁, 부패 척결 등에서도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고 있다.

총선 승리를 선언하는 머저르 페테르 티서당 대표 [로이터 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무엇보다 EU가 향후 단일대오로 외부 압박에 기민한 대응을 모색할 길이 열리게 된 것은 헝가리 정권 교체의 빼놓을 수 없는 효과로 꼽힌다.

유럽은 세계 2강 미국의 압박과 중국과의 경쟁 격화 속에 활로를 찾아야 하는 데다 러시아의 안보 위협에까지 대응해야 해 어느 때보다 단결이 절실한 시점이다.

샤를 미셸 전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헝가리의 정권 교체에 대해 EU와 헝가리 양측에 "매우 중요한 순간"이자 헝가리에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평가하면서 EU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켜 EU를 좀 더 통합적이고, 야심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 것으로 관측했다.

미셸 전 의장은 다만 오르반 총리가 더는 참석하지 못한다고 해서 EU 정상회의가 자동으로 순조로워지는 건 아닐 것이라며 머저르 대표가 선거 전 약속한 개혁이 현실이 되는지, 그리고 새 정부가 그러한 변화를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지를 지켜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헝가리 헌법은 총선 후 30일 이내 새 의회 소집을 규정하기 때문에 오는 21일 EU 외교이사회, 23∼24일 비공식 EU 정상회의까진 오르반 정부 인사들이 참석할 가능성이 높다고 폴리티코는 관측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도 이날 EU와 헝가리 간 접촉이 즉시 시작될 것이라면서도 본격적인 관계 정상화는 머저르 대표가 공식으로 총리에 취임하는 시점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머저르 대표의 총리 취임은 내달 중순으로 예상된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과 머저르 대표는 모두 유럽의회 최대교섭단체인 중도우파 정치 그룹인 유럽국민당(EPP) 소속이다. 머저르 대표는 선거 기간 동안 오르반 진영에 공격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폰데어라이엔 위원장과 거리를 뒀다.

한편,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EU 정책에 딴지를 걸던 오르반 총리가 퇴장하게 됐지만, EU가 외교 정책의 의사 결정에서 지금과 같은 회원 27개국의 만장일치 대신 15개국 이상 찬성하고 이들 회원국 인구가 EU 전체의 65%를 넘으면 통과되는 '가중다수결'로 전환해야 한다는 견해도 재차 밝혔다.

그는 이날 기자들에게 "외교 정책에서 가중다수결로 이동하는 것은 과거의 구조적 교착 상태를 피하는 중요한 방법"이라며 "이번 계기를 활용해 이 문제를 진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헝가리 등의 반대에 우크라이나 지원, 러시아 제재 등 주요 외교 현안에 신속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EU가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지면서 EU 내부에서는 만장일치 의결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최근 부쩍 커졌다.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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